마음, 영혼 개념, 그리고 인간 마음의 자유의지 문제를 통해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혼이라는 말을 정약용이 직접 쓴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맹자요의(孟子要義)」라는 작품에서 다산은 이런 발언을 했습니다. 사람 마음에 대해 우리가 지칭할 때, 마음 심(心) 자를 쓰는데, 정약용은 이 마음 심자가 정확한 개념이 아니다. 그냥 임시로 빌려 쓰고 있을 뿐이다.라는 생각을 표명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죽게 되면 그 마음을 혼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은 혼백 할 때 이미 있었던 개념이고, 유학자들이 썼었던 거고요. 예식에서도 상례에서 초혼제(招魂祭), 혼을 부르는 의식 절차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사람 마음에 대해 마음 심 자, 심장 심 자를 쓰고 죽고 나면 그 마음을 혼이라고 임시로 부르는데, 정확한 명칭은 없다.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조금 의아하기도 합니다. 관련된 대목을 먼저 보겠습니다. “신(神)과 형(形)이, 신명(神明)과 형체가 오묘하게 결합하여 사람을 이룬다. 이 신, 신묘할 신 자, 신명은 형체(形體)가 없으며 이름도 없다. 그것이 형체가 없기 때문에 이름을 빌어서 그냥 신묘할 신 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마음 심(心) 자, (이것은 원래 심장이죠.) 이 심 자는 피를 주관하는 장기로서, (심장으로서) 신과 형이 오묘하게 결합된 기관이기 때문에 그것의 이름을 빌어 마음 심 자라고 부른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심장이라는 장기가 피가 모여지는, 혈관들이 모이는 육체적 기능을 하죠. 그리고 유학자들은 이 심장이 정신적인 기능을 하는 맑은 기(氣)로 이루어졌다고 봤기 때문에 이 심장이라는 장기는 육체적인 기능, 정신적인 기능을 함께 하고 있다고 이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 마음을 가리킬 때도 할 수 없이 그냥 임시로 개념을 빌어 와 심장이라는 것의 심 자로, 마음 심 자도 지칭하게 되었을 뿐이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서 형체를 떠나면 혼(魂)이라고 말한다. 맹자(孟子)는 그것을 대체(大體), 마음을 가리킬 때 소체(小體)가 아니라 대체(大體)라고도 했고요. 불가(佛家), 불교에서는 그 마음을 가리킬 때 법신(法身)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문자 상의 일정한 명칭이 없다.” 마음이라는 용어는 굉장히 역사가 오래된 것 같은데, 지금 유학자 정약용은 인간의 마음을 가리키는 문자 상의 적절한 명칭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우리가 흔히 써왔던 개념들로서는 자기가 생각하는 인간의 마음이나 정신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역시 이 맥락에서 예수회 신부들의 영혼에 관한 이야기를 좀 상기해볼 필요가 있겠죠. 마테오 리치는 『천주실의』에서 아니마(Anima) 개념을 번역하기 위해서 혼백(魂魄)이라는 단어에 주목했었습니다. 백(魄)이라고 하는 것은 둔탁한 육체적 기운이고 흩어지는 거니까 이 개념은 제외시켜버렸고요. 혼(魂)이라고 하는 게 흔히 정신 작용을 하는 맑은 기(氣)로 간주가 됐습니다. 그래서 혼 개념을 가지고 오면서 마테오 리치는 영묘(靈妙)하고 이성적인 혼이라고 해서 영명할 영 자를 가지고 와서 영혼(靈魂)이라는 조어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역시 마테오 리치가 말했던 영혼은 리치 입장에서는 기(氣)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는 다소 물질적이고 언젠가 흩어져 소멸되는 거지만 아니마를 의미하는 영혼은 불멸하는 비물질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치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정약용도 심 개념이나 인간의 혼, 그리고 신명은 기가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 마음은 기존의 유학자들이 쓴 기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정약용이 마음을 가리키는 용어는 영체(靈體), 영명지체(靈明之體), 이런 표현들을 쓰고 있습니다. 영혼이나 영성(靈性)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는 않고요. 뭔가 자기의 의도를 담은 그 마음 개념을 가리키기 위해서 영체나 영명 지체라는 표현을 쓴 것인데, 마치 서양 선교사들이 새로 만들어 썼던 영혼이라는 뉘앙스를 얼핏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다산이 이런 발언을 하기 때문이죠. “몸은, 인간의 몸은 부모의 정혈(精血)로부터 받지만 신명(神明:정신 작용을 하는 것)은 상제로부터 받는다.” 이 구절을 음미해보면 신명, 정신 작용의 기원과 인간의 정혈로 이루어진 육체가 이원화돼서 다른 세계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기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신명(정신 작용)을 분리시켰던 점에서 외국 선교사들의 인간에 관한 이해를 정약용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죽고 나면 혼이라고 말할 뿐이라고 했을 뿐 사후에 이 영체, 영명, 신명의 마음이 어떻게 되는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한데요. 천주학 입장에서는 더 중요한 것은 사후에 이 영혼이 불멸하면서 심판도 받고 상벌도 받으며 천당, 지옥을 왕래해야 되는 이야기가 중요했을 것입니다. 정약용은 이 사후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본인 글 어디에서도 단 한 마디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런 측면 혹은 반대 측면으로도 다산의 생각을 해석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습니다.

 

그다음 영혼 이외에 기호성(嗜好性)이라는 성(性, nature) 개념과 자유의지에 대한 정약용의 입장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호, 기호라고 하는 것은 요즘도 쓰고 있는 말이기는 하지만 다산 입장에서는 욕구나 욕망 개념과 유사하게 언급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성 개념이 기존의 주자학에서는 본체, 형이상학적인 어떤 태극의 리 개념으로 이해되었는데요. 정약용은 이 성 개념을 그런 본체나 리가 아니라 욕구 작용으로 보았기 때문에 성은 기호다. 기호성이다. 이런 표현을 쓴 것입니다. 이 기호성도 인간 마음 안에 내재되어 있는 거죠. 마음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는 다산의 발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총괄하면 영체, 우리 마음 안에는 영묘한 어떤 것이죠.

 

영체, 우리 마음 안에는 세 가지의 어떤 이치가 있다. 세 가지 요소나 이치가 있다. 본성(本性), 기호성이라고 하는 본성의 측면에서 말하면 선천적으로 선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한다. 이것은 맹자가 말한 성선(性善)이다.” 그 권형(權衡), 권형을 자주지권(自主之權)이라고 나중에 말하는데, 자기 스스로 주장할 수 있는 권리, 권형, 권형은 둘 다 저울이라는 한자어입니다. 자유롭게 의지한다는 의미를 담아서 정약용이 쓴 표현이죠. “이 권형의 측면에서 말을 하면 내가 선을 행할 수도 있고 내가 선택해서 악을 행할 수도 있다. 이것은 고자(告子)의 단수(湍水) 비유와 선악이 섞여있다는 양웅(揚雄)의 설이 지어진 원인이다.” 그리고 그 행사(行事), 실천하는 행사라는 말 표현이 요즘 어감과 많이 다른데요. 육체를 갖추고 하는 행위, 그러니까 육체성과 관련된 마음의 어떤 측면을 말하는 겁니다. “이 행사(行事), 의 측면에서 말하면 선을 하기가 아주 어렵고 악을 행하기가 도리어 쉽다.

 

이것은 순자의 성악설이 나온 원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우리 영체, 마음 안에는 이 세 가지 측면이 원래 모두 함께 들어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좀 낯선 용어들이 몇 가지 같이 나왔는데요. 정약용이 생각했던 마음에는 이렇게 세 가지 요소의 원리가 함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 개념을 여전히 중요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성을 욕구나 욕망, 기호 작용으로 풀이합니다. 도덕적 리(理), 본성이 깃들어 있는 건 인간이 선천적으로 도덕적 욕망을 갖고 태어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유학자들과 비슷하게 정약용은 선천적으로 인간에게는 윤리적인 욕망, 선을 좋아하고 불선(不善)에 대해 꺼려하는 마음이 선천적으로 있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권형, 권형이라는 개념이 자유의지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데요. 아무리 우리가 도덕적인 욕망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고 해도 그 욕망의 욕구대로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만 하는데,라고 마음속으로 느끼면서도 우리는 정반대의 다른 행동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욕구, 사적인 욕망을 쫓아갈 거냐. 도덕적인 욕망을 쫓아갈 거냐.

 

그 이외의 어떤 욕구를 쫓아갈 것이냐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의지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걸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로 그 대목에서 권형 혹은 자주지권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이 마테오 리치가 썼던 용어들과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해당되는 대목을 살펴보겠습니다. “맹자가 말한 성선, 성선설에 어찌 잘못이 있겠는가? 다만 어쩔 수 없이 선한 사람이라면 그에게 공로(功勞)가 없게 된다. (그러니까 선천적으로 선을 느끼는 것은 배고플 때 밥을 먹는 것과 비슷하겠죠. 그래서 그것은 인간에게 공로가 될 수 없다고 말한 겁니다.) 이에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는 권형을 인간에게 부여해서 자신의 주장에 따라 선을 향하려면 그것을 따르게 하고 악을 향하려면 그것을 따르게 했으니 바로 이것이 공로와 죄가 발생하는 이유다. 이로부터 선으로 향하는 것도 그대의 공로, 사람의 공로가 되며 악으로 치닫는 것도 사람의 죄가 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주지권에 관한 한 대목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하늘은 사람에게 자주지권, 자기 스스로 주장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서 그가 선을 하고자 하면 선을 하도록 하고, 악을 저지르고자 하면 악을 행하도록 하여 선악을 하려는 방향이 변해서 고정되지 않게 했다. 그런데 선을 할 수도 있고 악을 할 수도 있는 이치가 이미 반이 섞여 있다면 그 죄는 마땅히 반감되어야 할 것 같지만 죄를 지어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이유는 선한 성이, 본성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성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수치스러워하는 것이 분명한데, 이러한 성의 성향, 경향을 거슬러 악을 저지르면 그 죄를 면할 수가 있겠는가?” 권형과 자주지권을 설명하는 정약용의 두 대목을 살펴보았습니다. 맹자의 성선설을 거부하지는 않고 있는데요. 선천적으로 윤리적인 경향성, 윤리적인 욕구, 선한 걸 좋아하는 마음이 인간에게 있는 것도 맞다. 이 점에서는 맹자의 성선설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왜냐. 선천적으로 윤리적 경향성이 있어서 그것을 실현한다는 것은 다산에게 아직 맹목적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배고플 때 밥을 먹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죠. 따라서 선천적인 윤리적 욕망과 그것을 가로막는 사적인 이기적 욕망 사이에서 선한 욕망을 선택하는 자주지권이 반드시 개입되어야만 인간의 공로, 윤리적 공로가 성립될 수 있다. 이런 주장을 하려고 했던 셈입니다. 바로 이 권형과 자주지권이라는 표현에서 마테오 리치가 강조하려고 했었던 자유의지의 맥락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 이런 평가가 많이 등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을 해보면 차이점이 발생합니다. 마테오 리치가 유학자들이 매우 중시했었던 측은지심(惻隱之心) 개념을 비판했던 대목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마테오 리치는 양선(良善)과 습선(習善) 개념을 이야기합니다. 양선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천주에 의해 선천적으로 타고난 선천적인 선함입니다. 습선이라고 하는 건 자기 노력에 의해 후천적으로 만들어내는 선함입니다. 그런데 이 양선을 부정하지는 못했지만 조금 폄하하면서 마테오 리치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선천적으로 타고는 선한 마음, 그런 것은 어린아이나 심지어 동물에게도 있습니다. 자기 새끼를 예뻐하고 아파서 쓰러져 있는 같은 자기 개나 고양이도 측은하게 여기는 그런 행위를 하기 때문에 어린 아이나 동물도 선천적으로 이 양선에 해당하는 측은지심과 같은 걸 가지고 태어난다. 따라서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습선이 필요하다.

 

오히려 마테오 리치에게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건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하얀 도화지, 백지와도 같은 것이라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선한 본성의 마음을 다소 폄하하는 듯한 발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유학자들, 그리고 정약용은 이런 맥락에는 동의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에게는 측은지심,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고 측은하게 여기며 동정심을 느낄 수 있는 선천적인 마음이 원래 주어져 있다는 것. 이것을 굉장히 중요한 토대로 봤습니다. 이런 공감 능력이나 측은지심을 타고나야 비로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측은지심이 선한 본성, 기호성이 실현된 도덕적 마음입니다. 그래서 정약용은 마테오 리치와 달리 이 측은지심, 도덕적 마음, 이 도심을 굉장히 강조했고, 이 도심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기호성, 선한 본성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관련된 한 대목을 살펴보겠습니다.

 

"만일 선을 즐거워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성, (이게 타고난 본성이죠.) 이것을 주어서 선을 좋아하고 의로움에서 살찌도록 하지 않았다면 평생 동안 힘을 다해 조그만 선을 행하려고 해도 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기에 타고난 본성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진정 최고의 보물이니 존중하고 받들어서 잠시라도 어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중용의 존덕성(尊德性), 성을 존중하고 받들어야 된다는 대목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약용은 우리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선하고자 하는 윤리적 경향성, 남과 함께 기뻐하고, 남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는 이 윤리적인 마음과 경향성, 이 본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일말의 선이라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대목에서 강조합니다.

 

따라서 아무리 권형이나 자유의지를 도입했다고 해도 유학자로서의 정약용에게는 인간이 타고나면서 가지는 선을 좋아하는 본성이 가장 중요한 토대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듯 영혼 개념, 마음 개념, 그리고 자유의지, 권형이나 자주지권, 여러 대목을 살펴보더라도 서학이라고 하는 것은 정약용의 방대한 사유체계 속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구성하는 한 면, 한 축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렇게 평가해볼 수 있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산 정약용의 사유는 서학의 지적 충격과 도전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정약용에게는 서학의 영향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명, 청 시대의 다양한 학풍들, 양명학, 고증학, 훈고학적인 방법론, 일본 고학, 그리고 주자학, 조선시대 성호학파를 통해서 배웠었던 내용들, 이런 것들이 융합적으로 깃들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한 측면을 통해 일방적으로 정약용 사유의 형성을 평가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다산 정약용은 한편으로는 성호학파 선배들을 통해 서학과 천주학에 눈뜨게 됐었지만 또 마찬가지로 성호학파 선배들을 통해 조선 주자학, 성리학과 양명학, 일본 고학, 명나라, 청나라의 다른 학풍들도 균형 있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습니다. 18세기, 19세기에 이런 여러 다양한 사상의 물줄기 속에서 자신만의 학문, 자신만의 사상과 철학을 구조화하려고 했었던 다산 정약용. 어떻게 보면 20세기, 21세기에 학문을 하는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도 모범적인 선례가 되는 사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서양 학풍에 일방적으로 경도되거나 아니면 우리 것이 좋다고 해서 전통만을 고수하는 이런 양면적인 입장, 이 두 입장을 지양하면서 서로 이질적인 사유와 사상 간의 대화, 통섭을 모색했었던 측면에서 다산 정약용의 사유, 철학의 긍정적인 의미를 오늘날도 다시 되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정약용의 일표이서(一表二書)가 지향했던 유교적 공동체의 성격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약용은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다음에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라는 글에서 자신의 학문 인생을 이렇게 총평했습니다. "육경(六經)과 사서(四書)에 대한 연구로 개인 수양을 삼고, 일표이서(一表二書)로 천하 국가를 위하고자 했으니 본말(本末)을 모두 갖추었다." 본말을 모두 갖추었다고 했을 때 본말이라는 것은 유학자 사대부가 자기 개인 수양을 위한 공부와 천하 국가를 경영하고자 하기 위한 일을 동시에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흔히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고 하는데요. 주로 경학(經學) 작품으로 알려진 작품들이 이 수기(修己), 도덕적 인간의 완성을 위한 목표를 갖고 있고, 경세학(經世學)이라고 알려진 다산의 작품들이 천하 국가를 경영하기 위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일표이서(一表二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라는 책, 이 정법서(政法書) 세 가지 책이 바로 정약용의 경세학을 대표하는 저작들입니다. 이 세 가지 책 성격에 대해서는 다산 본인이 이야기한 바가 있습니다. "『경세유표』라는 책은 그때그때마다의 시용(試用)에 구애받지 않고 장기적으로 미래를 내다보면서 이상적인 국가 운영 시스템을 마련한 책이다." 이렇게 소개를 했고요. 그와 달리 "『목민심서』나 『흠흠신서』는 당시 조선의 현실적인 법제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가장 시급한 민생 현안들을 그때그때 해결하기 위해 마련한 책이다." 이렇게 성격을 비교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번에는 다산의 정법서 일표이서 가운데 『경세유표』에 대해서 대략적인 성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약용도 일표이서에서 유교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는데, 이 유교적인 공동체 역시 중화 문명을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중화 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일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대략 두 가지 정도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왕도정치로 지칭되는 이상적인 정치 공동체, 이것을 실현한 상태가 문명의 상태이고요.

 

또 하나는 이런 왕도정치를 뒷받침하고 있는 효제충신의 도덕과 도덕을 구현하기 위한 다양한 예제(禮制)들입니다. 젊었을 때 정약용은 「맹자 대책문(孟子對策問)」이라는 글을 써서 정조에게 올린 적이 있는데요. 이 글에서도 이런 중화문명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공자나 맹자의 뜻도 존 주(尊周), 주나라를 섬기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존 왕(尊王), 나아가 행왕(行王), 왕도정치를 지향해서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다."라고 이런 해석을 단 적이 있었습니다. 정약용에게도 도덕과 예교(禮敎), 바로 이것이 왕도정치라는 이상적인 문명국가를 실현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대표적인 정치 저작인 『경세유표』에서도 이런 유교적인 예치(禮治) 국가를 지향하기 위한 대안을 마련해놓은 것입니다. 『경세유표』의 원래 제목은 『방례초본(邦禮草本)』입니다. 여기서 '방례'라고 하는 것은 방국(邦國), 번국(藩國), 다시 말해 제후국의 예제를 의미합니다. 천자국(天子國)이 아닌 제후 국가로서 조선이 천자국에 대해 어떤 외교 의례를 갖추어야 하는가, 이런 얘기로부터 시작해서 조선 내부에는 어떤 전장 제도, 예제를 갖추어야 하는가 하는 내용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방례초본』이고, 그 책의 이름을 『경세유표』라고 훗날 바꾼 것입니다. 이런 내용과 관련해 정약용이 했던 설명 한 대목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조선 같은 번국, 제후국의 의절(儀節)은 완전히 속국인 식민지화된 내복(內服)과도 같지 않고, 또한 조선이 직접 중국으로부터 명령을 받지도 않기 때문에 제후국의 일정한 도리를 지키며 일정한 분수만 넘지 않으면 그만이지, 그 이상 과도하게 어떤 무엇을 취할 필요는 없다." 이 이야기는 예제를 매개로 해서 국내외 관계를 잘 조정하기 위한 내용들을 제후 국가의 유교 지식인 사대부들이 자신들의 이상적인 관념에 따라 자유롭게 구성하고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이렇게 번국, 제후국의 의례, 의절, 예제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해놨고요. 다른 책을 통해서는 왕실의 예(禮), 왕실 가문들이 지켜야 하는 예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으며, 또 다른 저작에서는 지방 향촌의 향례(鄕禮)에 대해서 해명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문중에서, 가문에서 시행해야 될 가례(家禮)를 다룬 본인의 중요한 책자들도 만들었습니다. 다음의 표에서 보실 수 있는 것처럼 한 집안에서는 가부장이 문중에서 가례를 따라서 집안의 예식을 거행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다산은 『사례 가식(四禮家式)』이라는 작품을 만들었죠. 그리고 조금 윗단계로 올라가서 향촌 마을에서는 지방의 재지 사족(在地士族)들, 이런 사람들이 향약(鄕約)을 시행할 수 있는데, 향약도 향례의 일종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올라가 각 지방의 관하에서는 군수 현령들이 문묘(文廟) 석전제(釋奠祭)나 군현의 다양한 향례, 향사례(鄕射禮), 향음주례(鄕飮酒禮) 같은 역시 마찬가지로 향례를 시행해서 지방 사족들과 토족, 소민(小民)들을 교화하도록 설정을 해놓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윗단계로 올라가면 지방 군수, 현령 같은 위정자들, 지방 목민관들은 중앙정부, 국왕에 대해서 망 하의 례(望賀儀禮)나 진하 표전(進賀表箋) 같은 예식을 거행할 수 있었죠. 그리고 또 중앙정부에서 신하, 사대부들은 국왕에 대해서 수 조하 의례(受朝賀儀禮)를 비롯한 각종 예식을 거행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후 국가의 국왕, 왕들, 고려 왕이나 조선의 왕도 천자 국가에 대해서 다양한 의절, 예제를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내용들을 쭉 다루면서 번국, 제후 국가 내에서는 어떤 예제와 시스템을 갖추어야 되는가를 상세히 논한 책이 바로 『경세유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세유표』에서 다루고 있는 제후 국가의 예식, 이런 것들은 대략적으로만 주어져 있었을 뿐 어떻게 해야 제후 국가 내부의 외교의례와 전장 제도들을 만들 수 있는지 자세한 내용은 구성돼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조선 국왕과 신료, 다양한 관직자들이 천하 질서, 예치 시스템에서 어떤 자리를 점하고 있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전반적인 관료제 시스템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를 새롭게 만들어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례로 정약용도 『경세유표』에서 조선의 중앙정부의 조직을 만들어야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중국 고대 『주례(周禮)』에 기반해서 천자국이 360개의 관서로 구성되어 있다면 제후국 가는 이 정도 규모를 구성하는 게 적절하다는 판단에서 제안된 것입니다. 또한 관직 체계도 9등급 정도로 나누어서 재구성을 했는데, 1품, 2품을 정(正)? 종(從)으로 하고 3 품부터는 대부(大夫)로, 4 품부터 9품까지는 상사(上士), 중사(中士), 하사(下士)의 직책으로 규정을 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사(士)와 대부의 직책을 새로 규정한 것도 번국의 의례에 맞게 다산이라는 유학자 입장에서 제안된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렇게 천자국과 제후국 간의 예를 매개로 한 위계질서는 더 나아가 제후국 내부의 신분질서, 인륜 관계를 새롭게 재구성하도록 하는 중요한 명분을 제공했습니다.

 

정약용은 방국례, 전국의 예에 해당되는 『경세유표』를 작성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조선 내부의 통치질서, 신분관계, 예를 들어 군신관계, 관인, 관리와 민중의 관계, 사족과 상한(常漢), 평민들의 관계, 주인과 노비의 관계들을 적절하게 명분에 맞게 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의 사례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주례」의 ‘향수제(鄕遂制)’라는 것을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향수라는 용어에서 '향(鄕)'이라는 것은 고대 국가의 도성 내부의 여섯 마을, 육향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육향 주변에, 도성 근교에 육수(六遂) 지역을 따로 마련하도록 구조화해놨던 게 향수 제인 데요. 이 육향이라는 것을, 도성 내부에 있던 육향 마을의 구성을 다산은 여러 경전을 고증하면서 다음과 같이 재해석해냈습니다. 도표를 보시면 보이시겠지만 도성 내부의 중앙에는 왕성, 궁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궁궐의 앞쪽에는 육조(六曹), 정부 관청들이 늘어서 있고요. 궁궐의 뒤쪽에는 상공업, 상업, 수공업 특구, 특수지역을 마련했습니다.

 

경제구역이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양옆으로 육향, 여섯 마을들이 설계되어 있는데, 바로 이 육향의 여섯 마을에서 거행하는 예식을 향례라고 해서 이 내용을 고대 경전을 통해 고증을 해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약용에 의하면 바로 이 육향의 향례는 원래 서울의 예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시대가 바뀌어서 조선은 지방을 군현제로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천자국 같은 봉건제 시스템이 아니었던 거죠. 그래서 번국의 상황에 맞게, 제후국의 상황에 맞게 이 육향제를 정약용은 재해석했습니다. 즉, 지방 향촌의 목민관들, 위정자들이 고대 육향의 향례를 지금 지방 향촌의 향례로 거행하면 되겠다. 군수 현령이 다스리는 지방이 옛날 제후국의 봉토와도 같고, 지방의 수령들이 과거 향대부나 주장(州長)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육향의 서울의 예식을 지방 군현의 향례로 거행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정약용의 육향제에 대한 해석도 천자국의 고대의 예를 조선, 제후국에 맞게 재해석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경세유표는 제후국의 지위와 상황에 맞게 원칙적으로 중앙정부 조직을 구성하도록 시도를 했고, 마찬가지로 지방 행정 시스템도 중앙과 일관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고 했습니다.

 

『목민심서』 내용을 보면 이호 예 병형 공(吏戶禮兵刑工), 그 행정 파트가 서울의 중앙정부와 똑같이 육전(六典) 체제로 운영되도록 전개되어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중앙과 지방행정의 통일, 관직제도, 신분 등급의 관리, 도성과 향촌 주거지를 구획하는 것, 학교 교육 그리고 과거를 통한 인재 선발, 조세, 토지, 군역 제도 등 모든 분야를 총망라해서 정약용은 『경세유표』를 통해 예치 그리고 법제의 원칙에 맞게 질서 정연하게 국가 운영 시스템을 구조화하려고 했습니다. 한때 정약용의 『경세유표』는 왕권 강화론을 지향하는 작품이 아니냐고 해석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경세유표』는 단순히 국왕이나 특정한 신분의 구성원을 지지하기 위해 기획된 텍스트는 아니었습니다. 하다 못해 국왕도 의정부나 육조로 편성된 관료제 시스템에 철저히 종속되도록 공적인 체계를 구상하는 것이 다산의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약용은 일체의 국왕 관련 직속기구들, 승정원 같은 비서실, 종친부 같은 왕실의 친인척에 관련된 부처들 그리고 친위부대들, 이런 직속기구들을 최대한 모두 다 없애버리고 오직 국왕에게는 관리 임면 권한 그리고 고적제(考績制), 인사고과제를 평가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이 두 가지 권한 정도만 국왕에게 남겨놓았습니다.

 

국왕도 이러했을 정도니까 다른 신료들은 말할 것도 없었겠죠. 그래서 유교사회에서 실현 가능한 공정하고 원칙적인,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방식의 일관된 정치 시스템을 고안하려고 했던 것이 정약용의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정약용의 『경세유표』라는 텍스트 아래에는 이렇게 예치 시스템, 예제(禮制)에 대한 강한 신념이 있고요. 이 예의 정신을 돕도록 고안되어 있는 유교적 성격의 법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유학자들의 예제와 유 교화된 법은 차등적이고 권위적이라는 심각한 비판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여지가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인륜 개념을 중시했던 유교 지식인들은 모든 사회 구성원들, 인간을 똑같이 획일적, 일률적인 존재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의 능력이 다르고 타고난 성품, 성격이 다르고, 공동체에서의 역할과 공로(功勞)가 제각기 다르다고 보았기 때문에 어떤 타당한 기준들에 의해서 구성원들을 차등적으로 대우하는 것이 오히려 공정하다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통치 원리로써의 예, 예제라고 하는 것은 이런 차이점들을 염두에 두고 상하귀천(上下貴賤), 관리들 관직의 차이죠? 친소 존비(親疎尊卑), 어떤 혈연적인 관계의 차이들, 이런 것들에 따라서 상이한 책임과 역할, 권리를 관계 맺는 인륜 관계의 구성원들에게 부여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더구나 예라고 하는 것은 윗사람과 아랫사람 상호 간에 쌍무(雙務)적인 책임감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윗사람이 아랫사람들에게 강한 책무를 요구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윗사람이 잘못하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비판하고 저항할 수 있는 명분도 동등하게 제공을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부정적인, 비판적인 맥락 이외에도 다른 사회적 기능이나 효과에 대해서도 함께 비판적으로 재성찰을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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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정조와 사대부들의 관계에 대해 조금 더 이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조는 윤음(綸音)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 정책을 이렇게 표현하곤 했습니다. 우문 지치(右文之治), 우문 일념(右文一念)을 실현하겠다. 이건 문신, 사대부들을 특별히 우대하고 이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시행하겠다는 뜻을 표방한 문구인데요. 바로 이런 자신의 문예 부흥 정책에 따라 규장각 제도를 운영하고 재야 산림(山林)들 가운데 뛰어난 학자들을 관료로 추천해서 뽑아 올리는 사대부 우대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경연 자리에서도 나타났던 것처럼 경연에 참석했던 경연관들의 졸렬함을 대놓고 비판하는가 하면 규장각 각신들, 규장각 초계문신들까지도 냉혹할 정도로 비판했었던 정조였기 때문에 일반 재야의 선비들, 사류(士類)의 저급한 풍속을 비판하는 수위는 그것보다 훨씬 더 심했습니다.

 

일반 선비들이 지방에서 행패를 부리고 다니거나 예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경우 일일이 예를 들어가면서 강력하게 비판하고 규제를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역설하는 대목들이 실록의 여러 장면을 통해 등장합니다. 정조는 이런 표현을 직접 쓰기도 했는데요. “시대를 바로잡고 풍속을 구제하는 방법으로 사습(士習)을 바로잡는 일보다 시급한 것이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 당시 시대의 풍속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선비들, 바로 이 사람들의 풍속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게 급선무다. 이 이야기를 했었던 건데, 그런 자신의 역할을 정조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교시 정속(矯時正俗), 교시 구속(矯時救俗), 그러니까 시속을 바로잡고 풍속을 올바르게 고치는 그런 것을 나타낸 표현인데, 이 풍속과 시속, 사대부들의 습관, 태도를 바로잡는 역할이 바로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 이런 입장을 표명한 문구입니다. 이렇게 정조는 사대부들의 풍속, 사류의 시속을 바로잡는 역할이 실질적으로 자기에게 있었다고 했는데, 학풍과 시속을 바로잡는 그런 어떤 실권자로서의 정조의 역할을 잘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있었습니다.

 

정조가 집권 중반기에 노론 벽파의 입장에서 나온 남인들에 대한 비판, 다시 말해 노론 벽파가 남인학자들이 서학과 천주교에 너무 지나치게 빠져 있고 경도되어 있는 것을 비판하면서 천주학에 빠져 있는 남인 학자들을 공격하고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내세우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런 무렵에 정조는 사대부, 선비들의 이런 여론을 조정하기 위해 문체반정(文體反正) 사건을 일으킵니다. 연암 박지원 같은 인물들이 이 사건에 연루가 됐었죠. 문체반정 사건은 전아 한, 고급한, 정통스런 문체를 구사하지 못하고 명청 시대의 저급한 패관소품체(稗官小品體) 문체들, 저급한 항간의 문체들을 흉내 내서 글쓰기 하는 풍조가 노론계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는 것을 꼬집었었던 이야기인데요.

 

정조는 문체반정 사건을 일으키면서 노론계 젊은 자제들이 명청대 학풍을 추종하는 이런 속학(俗學) 경향, 이게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문제 제기를 합니다. 그래서 서학 문제에 대한 대항마로 명청대 속학에 빠져 있는 이것을 대항마로 내세웠던 것입니다. 노론과 남인을 중재하기 위한 정조의 의도적인 정책의 하나였었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정조는 이것을 스스로 이열치열의 대국 방식이다. 이렇게도 표현을 했습니다. 노론 자제들이 정통 주자학을 내세우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지나친 당물(唐物) 취향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당물이라고 하는 것은 당나라 물건, 당나라 문풍을 이야기하는데, 당나라라는 것이 외국, 중국을 흉내 내고 외국 수입품이나 이런 것들을 좋아하는 것의 대명사로 당물이라는 표현을 썼던 겁니다. 그래서 외국 물건이나 외국 풍조를 모방하고 좋아하는 당물 취향이 노론계 자제들에게 너무 많이 유포되어 있다. 명청대 소품, 아까 패관소품의 이런 것들을 흉내 낸다든가, 북경에서 가져온 외국 물건들, 기물(奇物)들을 좋아라 한다든가. 이런 것들을 꼬집으면서 노론 자제들을 비판을 했었던 거죠.

 

그때 했었던 정조의 비판 대목을 한 구절 살펴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미 우리 동방에 태어났다면 마땅히 우리 동방의 본색을 지켜야지 어찌 중국 사람을 본받으려 애쓸 필요가 있겠는가. 서학도 빗나간 학문이지만 패관소품체, 북경의 기물이나 명청의 소품에 빠져 있는 학문, 속학도 문제가 있는 건 마찬가지다. 따라서 오늘날 공부하는 자들은 서양의 학문, 서학, 이런 사학(邪學)을 두려워하는 만큼이나 중국의 소품도 두려워해야 된다.”라고 하면서 양쪽 진영을 모두 다 경계시키면서 이열치열의 대국 정책으로 조율하고자 하는 그런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것은 남인의 입장과 노론의 입장을 모두 다 이해하고 노론이 남인의 천주학 경도를 비판하는 현상을 남인 쪽의 입장에서 노론의 외국 풍조, 당물, 명청 시대 풍조에 빠져 있는 입장을 비판하도록 했던 것인데요. 사대부들의 여론을 조율하는 실질적인 어떤 조율자, 조정자가 국왕 본인이라는 것을 여실하게 드러낸 하나의 사례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역시 마찬가지로 군사(君師), 군사 가운데 사도(師道), 학문적인 수장으로서의 본인의 입장을 강조했던 그런 정조의 정책의 일환이었었는데, 어째서 학문의 수장, 사도가 자신에게 있을 수밖에 없는지를 역설하는 정조 본인의 발언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선비는 나라의 원기(元氣)다. 열성(列聖)이 배양한 훌륭한 덕을 내가 감히 공경하며 따르지 않고 어그러진 채 놓아두고 가르치며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또한 인재를 만드는 도리를 다 하는 것이 아니다. 오도(吾道)가”, 우리의 도, 이것은 유학의 도를 말합니다. “오도가 날로 고단해지고 선비의 추세가 날로 잘못되고 있는데도 스스로 행하고 그침에 있어 취하여 재단하는 바가 없구나. 내가 비록 덕이 없어도 어찌 사도로서 자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대목을 이어서 더 보겠습니다. “삼대(三代) 이후에 사도가 아래 있었으니 주렴계·장횡거, 정자, 주자가 성리(性理)를 설명한 것은 성인을 계승하고 후학을 열어 준 책무를 자임한 것이다. 그러나 근세에는 아래에 사도가 있음을 듣지 못하였다.” 그러니까 스승의 도리, 도가 아래 선비들, 신하들에게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이런 뜻입니다. “상서(庠序)와 학교의 정사에 있어, 학교의 운영 제도에 있어 내가, 군주인 내가 실로 부끄러움이 있다고 하겠다.

 

스스로 생각해 보면 어렵고 중대한 일에 뛰어드는 것에서 어찌 자신의 능력 없음만을 탓하면서 군사의 책임을, 책무를 자임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 대목을, 두 대목을 찬찬히 읽어보면 과거 고대 시절에는 스승의 역할, 학문의 도가 밑에 학자들에게, 신료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근세에 국왕 정조가 통치하고 있는 이 시대에는 사도가 아랫자리에 사대부, 신료, 학자들에게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선비, 선비 사, 선비들의 사기(士氣), 이 선비의 기운이 나라의 중요한 원기인데도 불구하고 선비들의 풍속이 어그러지고 추락하며 사도가 떨어지고 없어진 시대에 바로 이 학문의 도를 본인이 어렵지만, 국왕 정조인 본인이 짊어지고 가겠다는 책무를 자임하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이것은 학문의 수장을 자임하면서 정치적인 정통성과 권위도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이야기로 연결된 발언이었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군사’라는 표현은 사실 정조가 독점해서 썼었던 것이 아니라 선대의 왕이었었던 할아버지 영조 때부터도 유행을 했었던 말이고, 국왕만 썼었던 표현도 아닙니다. 사대부 관료들도 ‘군사’라는 표현을 자주 썼는데요. 오히려 국왕 자신보다는 군왕의 자질과 인격을 독려했었던 사대부 관료들에 의해서 자주 언급됐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조를 경연 자리에서 신랄하게 비판했었던 재상 김종수도 주희의 『대학장구大學章句』 「서문(序文)」을 풀이하면서 ‘군(君), 사(師)’ 두 개념을 완미(玩味)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주희는 『대학 장구大學章句』 「서문(序文)」, 그리고 『중용(中庸)』 등을 이야기하면서도 ‘군사’라는 표현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총명예지자(聰明叡智者), 누구나 자기의 선한 본성을 잘 살릴 수 있는 총명예지자는 뭇사람들의 지도자가 되고, 학문의 리더, 지도자가 되어서 민중을 잘 통치하고 계몽할 수 있다는 그런 맥락에서 일반적인 명사로 ‘군사’라는 말을 풀이했습니다.

 

따라서 ‘군사’라는 것은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뛰어난 위정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 스스로 자임할 수도 있는 표현이었었는데, 유독 이 시대에 군주 정조가 내성외왕(內聖外王)으로서의 성왕(聖王)의 이념을 내세우면서 스스로 ‘군사’를 자임했던 것이 더 강력해졌다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군주로서의 정조는 사대부 신료와 자신 사이에 뛰어넘을 수 없는 분의(分義), 한계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직시하고 있었고, 또 이 점을 노골적으로 강조했습니다.

 

군신 간에 마음이 서로 상통하는 것으로 보면 한 집안의 부자지간 같아서 친밀하지만 그 분의, 분수의 한계가 건너뛸 수 없는 것이 분명한 점은 마치 사람이 사다리를 가지고 하늘에 올라갈 수 없는 것과도 같다고 비유해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계단을 뛰어넘어 임금의 당에 올라오고자 하는, 엽등하고자 하는 신하들이 있고자 한다면 마치 이것은 양학(洋學)을 하는 사람들이 중간 단계를 뛰어넘어 곧바로 하나님에게, 상제, 천주에게 이르고자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렇게 비판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조는 양학, 서양학을 하는 사람들 혹은 천주학을 하는 사람들이 걸핏하면 하늘을 자주 들먹이면서 유황 강충(惟皇降衷), 소사 상제(昭事上帝), 위의 하늘을 섬긴다.

 

이런 표현을 하는 것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는데요. 그 짧은 대목을 잠깐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하늘이 기화(氣化)로만 만물을 낳지 못하니, 한번 형화(形化)를 더 거친 뒤에 부부가 생겨나고, 부부가 생긴 뒤에 부자지간이 생겨나며 부자가 생긴 뒤에 군신관계가 생기고, 군신이 생긴 뒤에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 간의 질서가 생겨난다. 그런데 저 양학, 서양학을 하는 양학에서는 도리어 임금과 부모를 도외시하고서 직접 하늘과 접하고자 하는데, 그 죄는 도리어 하늘을 무시하는 데로 귀결된다.” 여기서는 마치 양학을 비판해서 양학 하는, 천주학 하는 무리들이 중간 단계, 인륜관계를 다 건너뛰고 곧바로 상제, 천주와 닿으려고 하는 것의 문제점을 비판한 것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이야기는 국왕 정조와 신하 사이에 건너뛸 수 없는 분수의 한계, 분의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 맥락과도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정조는 1793년 「경사강의」에서 「대학」과 「서경」을 강론할 때도 임금의 호오(好惡)와 일반 사람들의 호오(好惡)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이렇게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학자의 호오는 제 한 몸을 착하게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불과하지만 임금의 호오는 실로 만백성의 행불행(幸不幸)이 모두 다 걸려 있는 것이다.” 학자나 사대부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만백성을 통치하는 군주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느냐. 군주의 호오는 정치적으로 굉장히 막강하고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런 것을 강조했던 대목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정조가 거의 말년에 학자들에게 이런 것을 요구했던 적이 있는데요.

 

예를 들어 1798년 본인이 작성했었던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 이런 글을 쓰면서 만천 명월, 만천, 온갖 강과 내들이죠. 명월은 밝은 달입니다. 세상에 있는 온갖 수없이 많은 강에 밝은 달이 비추고 있다. 주인 옹, 옹은 노인, 할아버지를 존대해서 하는 말이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강들은 백성들을 비유한 겁니다. 만천, 신하들, 신민들을 다 포함하죠. 명월은, 밝은 달은 본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신민들을 비추고 있는 밝은 달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얘기한 것인데요. 만천 명월 월인천강(月印千江), 이런 표현들은 주자학에서도 이미 다 쓰이고 있던 표현들입니다. 밝은 달은 태극이나 태극의 리를 말하는 것인데, 정조는 바로 이 명월, 밝은 달이 태극이고, 태극이 곧 자기 자신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절대군주의 입장이나 지위를 이런 형이상학적인 비유, 발언을 통해서 강조했던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정조는 『일득록(日得錄)』의 기록을 보면 1799년에도 사대부 신하들에게 「만천 명월 주인옹」의 이 글귀, 그리고 그 서문의 내용들을 복사해서, 필사해서 적어오라는 과제, 숙제를 내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야기에 의하면 정조 국왕의 숙제, 과제를 신하들이 제대로 해오지 않아서 다그치는 그런 장면도 등장하기도 합니다.

 

본인 입장에서는 명실상부하게 태극, 황극(皇極)의 입장에 있는 군주의 위상을 드러내 보여주고 싶었지만 신하, 신료들이 그만큼 적극적으로 호응하지는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년에 군주였던 정조는 황극의 정치를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오황극(五皇極), 황극이라는 것은 「서경」 홍범 제4장에 나오는 홍범구주(洪範九疇) 가운데 다섯 번째 항목입니다. 홍범구주는 고대 전설적인 중국의 우임금이 왕위를 계승해 천하 국가를 통치할 때 사용했었던 아홉 가지 정치 경영의 원리를 구주, 홍범구주라고 이야기하는데요.

 

그 가운데 다섯 번째 등장하는 오황극, 황극, 황극이라는 것은 천하, 세상의 모든 갈등과 분쟁을 조율해서 공론을 창출하는 기준, 원칙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정조가 홍범구주에 나와 있는 다섯 번째 항목 오 황극, 황극의 정치를 표방하고 강조했었던 것은 본인이 역시 사당(私黨)과 여러 당파들, 당색이 다른 학자, 관료들을 통제하고 조율하면서 탕평(蕩平)의 정치를 실현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었습니다. 탕탕평평이라는 그 글귀도 「서경」 홍범 제14장에 이 구절로부터 나왔었죠. 무편 무당(無偏無黨) 왕도 탕탕(王道蕩蕩) 무당무편(無黨無偏) 왕도평 평(王道平平). 탕탕평평 한 정치적 공정성, 공공성을 실현하겠다는 왕도정치의 이상을 표명한 대목인데요. 바로 이 홍범 구절을 인용하고, 홍범구주의 오 황극을 강조하면서 공정한 정치, 정치적 공공성을 본인이 주도적으로 주인공이 되어서 실현하겠다. 탕평정치를 실현하겠다는 국왕 정조의 그런 정치 이념을 강조했었던 그런 사건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정약용의 일표이서(一表二書) 가운데 『목민심서(牧民心書)』와 『흠흠신서(欽欽新書)』의 내용에 대해 대략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목민심서』는 지방 정치 운영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목민심서』를 살펴보면 그 당시 18, 19세기에 지방 정치의 생생한 현상을 목격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 『목민심서』라는 책은 다산 입장에서는 당연히 목민관들이 읽을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목민심서』라는 책의 주인공은 중앙정부에서 지방에 파견된 지방관들, 군수, 현령과 같은 목민관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목민관들이 정치 여론을 공공의 의론으로 조성하기도 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죠. 그런데 『목민심서』에는 주인공 목민관만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연급의 다른 여러 조연들이 등장합니다. 관하(管下)에는 아전(衙前)으로 불렸던 하급관리들이 있습니다. 향리(鄕吏)들이죠. 중인 계층. 이런 사람들이 등장하고요. 또 지방에는 학식과 인품으로 이름 난 지방의 유지들, 지방 재지 사족(在地士族)들이 등장합니다. 이 사족(士族), 선비들은 과거에 벼슬을 했던 전직 관리일 수도 있고 지금은 퇴직해서 향촌에서 학자로 이름을 날리는 유지 정도일 수도 있습니다. 유향소(留鄕所), 향청(鄕廳)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좌수(左手)? 별감(別監)과 같은 직책을 갖고 있었는데, 아전(衙前), 향리들을 감독하거나 향민(鄕民)들을 감독할 때 협업을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 지방 학교에는, 향교(鄕校)에는 선생들, 교수 역할을 맡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지방 향촌 농민, 소민들을 한시적으로 대변하는 대리인들, 이들을 향갑(鄕甲)이라고 했는데 면리임(面里任)이라고 해서 오늘날 통반장 역할 정도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풍헌(風憲)이나 약정(約正)이라고 불렸죠. 이 외에 다수의 농민들과 노비들이 등장합니다. 다산이 기록한 바에 의하면 바로 이런 다양한 주인공들이 함께 등장해서 『목민심서』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데요. 이 책에서 정약용은 비슷한, 재물에 대한 욕망, 권력에 대한 욕망을 가진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어떻게 갈등하고 대립하고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공모를 하기도 하는지를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목민관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다른 공모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목민관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사회 구성원들을 감시하고 염탐하고 밀정을 내보내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당시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정약용의 발언 한두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요즘 향리들은 재상(宰相)과 결탁하고 감사(監司)와 내통하며, 위로는 관장(官長)을, 수령을 우습게 보고, 아래로는 민생을 들볶는다. 이들 향리, 아전들에게 굴복하지 않아야 현명한 수령이다." "내가 오랫동안 시골에, 향촌에 있으면서 수령의 출척(黜陟) 권한이 오로지 아전들의 손아귀에 달려 있는 것을 목격했다. 순영(巡營)의 저리(邸吏)가(관찰사가 내보내는 부하) 지방의 현리, 관아의 아전들과 상통해서, 공모를 해서 헛된 칭찬과 억울한 무고를 만들어내 저들이 평가하고 싶은 대로 수령을 평가한다.

 

그것은 순영의 감사가 자신의 부하들을 풀어서 수령을 염탐하게 하면서 그들 부하를 심복처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잘못은 감사에게 있는 것이지만, 수령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그래서 자수(自修), 스스로를 수양한다는 두 글자만이 해악을, 앞으로 닥칠 피해를 쫓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살펴보신 바와 같이 감사 그리고 수령조차도 수시로 염탐법을 썼고요. 밀정을 내보내서 관민들을, 민간인들을 감찰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밀정을 내보내 염탐 법을 썼다는 것이 이해가 잘 안 가실 수도 있지만, 정조 연간에 암행어사(暗行御史)를 내려보내서 지방의 관리들을 남몰래 살피고 감찰했던 것도 비슷한 정치 행위라고 이해해보시면 쉽게 와닿으실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의 목민관들은 향리, 아전, 다른 향승(鄕丞)이나 향갑들과 비슷한, 유사한 권력투쟁을 벌이는 인물로 등장을 합니다. 목민관도 완벽한 도덕의 주체가 아니라 평범한 욕망의 주체로 그렸던 것입니다. 향리와 향민들도 똑같이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다투며 경합하는 정치적 주체로, 중요한 인물들로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양자의 싸움, 권력다툼을 차별화하는 기준을 다산은 무엇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자기 수양과 통제가 철저한 도덕군자(道德君子)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만을 탐하는 소인배(小人輩)의 무리인가? 사실 이 두 측면이 수령의 염찰(廉察), 염탈(염탐? 05:45, 음성상 “염탈”) 행위와 향리 아전들이 수령을 염탐하는 행위를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였습니다.

 

백성을 위한 윤리적 선심을 가지고 있는가? 바로 이 점만이 목민관의 정치행위를 향리나 향민들의 권력을 위한 공모 행위와 구별해줄 수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목민관의 도덕성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율기(律己)], [봉공(奉公)], [애민(愛民)] 편(篇). 삼강령(三綱領)에 해당한다고 할 수도 있는 이 앞부분에서 목민관의 도덕성을 유독 강조합니다. 어떤 이익에도 굴복돼서는 안 되고, 위협에도 타협을 하면 안 되고, 상관들의 독촉에도 의연히 버텨야 하고, 봉록(俸祿)이 적은 것에도 연연해서는 안 되고, 몸가짐, 행장(行狀)을 검약하게 하고, 자기 집안의 처자식, 가솔들을 철저히 단속해야 하고, 이런 것들을 유독 강조했던 것은 향리 아전들이나 지방 사족들, 향승 그리고 민의 대리자들인 향갑, 이런 사람들 앞에서 철저히 도덕군자로서 정치적인 정당성을 목민관이 확보해야만 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정약용이 유학자로서 구성원들의 욕망과 이해갈등, 이것을 어떻게 조절할 것이냐? 이 문제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다양한 군상들의 욕망을 통제할 수 있는 도덕적인 인물, 이것을 모델로 제시했다는 점입니다. 다산에게 목민관은 탐욕스러운 하급관리 그리고 유약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이 따라야 할 도덕규범을 제시하는 인물입니다.

 

정치, 정치행위를 대등한 욕망의 주체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것으로 이해했다기보다 도덕적인 아버지, 스승과 같은 인물이 규범, 모범을 제시하면 약하고 어리석은 아랫사람이 그 도덕적인 모범에 해당하는 목민관을 따르고 존중해야 한다는 교육적 모델로 정치를 해석했던 점입니다. 이렇게 도덕적 탁월성에 기반해서 목민관의 정치행위의 정당성을 제시를 했던 측면이 있고요. 『목민심서』에는 예제(禮制), 앞서 『경세유표』를 할 때 말씀드렸던 것처럼 예제(禮制)의 차등성에 의해서 구성원들을 통치하고자 하는 면모도 드러납니다. "목민관이 백성들에게 예속(禮俗)을, 예를 가르쳐야 한다."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산은 수령들이 담당해야 하는 중요한 군현 의례들을 『목민심서』에서 설명합니다. 삼단 의례라고 해서 사직단(社稷壇), 성황단(城隍壇), 이런 데서 치르는 의례도 있었고요. 또 중요한 것은 문묘(文廟), 공자의 위패를 모신 곳에서 지내는 공자에 대한 제사인 석전제(釋奠祭) 같은 것도 있었고요. 향사례(鄕射禮)나 향음주례(鄕飮酒禮) 같은 것에서 향례를 거행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예식의 거행을 통해 향촌 사회에는 수령, 향리, 향승, 향갑, 소민, 노비들과 같은 서로 위계가 다른 다양한 구성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계몽하도록 하려고 했던 것이죠. 관직자, 재지 사족들이 상족이라면, 향리는 중족에 해당되고, 소민이나 노비들은 하족에 해당되는 그런 위계질서를 점하고 있었겠죠. 이런 식으로 『목민심서』는 위정자, 목민관의 도덕적 탁월성, 우월성과 예제의 차 등성에 기반해서 지방 향촌을 통치하고 운영하도록 설계해놓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차 등성이 여전히 문제가 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 보면 도덕적 보편성이라는 것도 그 밑바탕에 있었다는 점을 염두해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도덕성이라는 것은 짐작되듯이 위정자, 목민관이나 지방 사족, 관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유효했던 것이 아니라, 소민들과 천민들에게도 역시 마찬가지로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은 『흠흠신서』의 중요한 전반적인 가치나 의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약용은 당시 목민관들이 법전과 형률에 무지한 것을 심각한 문제라고 개탄하기도 했습니다. 사대부들이 법전을 읽지 않고 형률이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는 것을 개탄하면서 적어도 정조시대에 만들어진 조선 법전인 『대전통편(大典通編)』 그리고 중국 『대명률(大明律)』 정도는 곁에 두고 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흠흠신서』라는 작품은 알려진 것처럼 매우 희귀한 판례집, 형사사건, 특히 살옥(殺獄)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형사사건 판례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흠흠신서』는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그 첫 번째 파트가 「경사 요의(經史要義)」라는 부분입니다.

 

「경사요의」, 이것은 경전과 역사책들 가운데 재판에 도움이 될 만한 그런 문구나 내용들을 모아서 핵심적인 것들만 다시 엮어놓은 것입니다. 「경사 요의」 부분의 다산의 설명 한 대목을 살펴보겠습니다. "단옥(斷獄)의 기본은", 단옥은 옥사, 재판을 판결한다는 뜻입니다. "단옥의 기본은 흠휼(欽恤) 정신에 있다. 신중하게 살피고 신중하게 여기는 정신에 있다. 흠휼이라는 것은 해당 사건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그 사람을 불쌍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그런데 형사사건 처리에는 원칙과 예외가 있으니, 융통성이 없어서는 안 된다. 간혹 해당 법조문이 없을 경우에 고훈(古訓)과 고사(古事)를 인용해서 판별하는 바탕으로 삼아야 하니, 이에 경전과 역사서의 중요한 뜻을 간추려 쓸 수 있도록 대비해놓았다." 중국의 법전과 조선시대 법전도 역시 마찬가지지만, 유교사회의 법전들은 유교 경전에 나오는 도덕적 이념과 가치를 반영해서 독특한 방식으로 유 교화된 결과물입니다.

 

앞서 경사(經史)의 내용들을 미리 대비해놓았다는 정약용의 발언은 이런 유교 경전의 가치와 덕목을 재판 과정과 형률에 적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유학자로서 비슷하게 공유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재판할 때 유교 경전의 내용을 인용해가면서 판결하는 인경결옥(引經決獄), 경전을 인용해서 재판을 판별하기도 했고요. 유교 경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그 형률의 내용을 주석하기도 했고요. 이 경주율(以經註律)의 방식으로요. 유학자들의 예제의 내용을 직접 법조문에 수록해서 강제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런 역사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유교의 법 관념, 법조문에는 ‘효제(孝悌)’라는 가족 중심의 유교 경전의 덕목이 철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 상하귀천, 친소 존비(親疎尊卑)에 따라 차등적으로 적용되는 예 관념도 철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가부장 중심의 종법제(宗法制), 종법제에 기반한 가족 규범이 법조문에 수록이 되어 있고요. 부모, 형제, 친인척, 무 복친(無服親)의 관계냐에 따라 차등적으로 형률을 적용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효제자(孝悌慈), 충효열(忠孝烈)의 강상 윤리를 수호하기 위해 이 강상(綱常) 윤리를 어기는 강상 범죄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하게 가중처벌했습니다. 존속범죄가 여기에 해당됐겠죠. 또 반대로 효를 실천하기 위해서, 가령 부모의 원수를 위해서 그 원수를 살해하는 이런 개인적인 복수 행위를 유교 경전의 이념에 따라 감형하거나 때때로 사면하기도 했습니다.

 

정약용의 『흠흠신서』에도 이런 유교적인 가족 규범, 덕목이 반영되어 있는 원칙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가령 구수천살(仇讐擅殺), '원수를 멋대로 죽인다. 사적으로 죽인다.'라는 것인데요. 자기 부모의 원수나 효제를 실천하기 위한 사적인 복수 행위를 부분적으로 허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의살물수(義殺勿讐), '의로운 살인에 대해서는 재복 수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내가 부모의 원수를 죽였을 때 그 원수의 자식이 또 나에게 복수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경우 말고도 부도덕한 패륜자(悖倫者), 강상 윤리를 어긴 자를 죽였을 경우 의로운 살인이라고 해서 감형하거나 방면하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이런 내용들이 반영된 것은 조선의 법전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經國大典)』?형전(刑典)?에 ‘고 존장(告尊長)’, 존장을 고소하는 경우의 처벌을 예로 들 수 있는데요. 조선시대 법전에서는 자손이나 처와 첩, 노비 등이 그 부모, 가장을 고소하게 되면 최고형인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노비의 처와 노비의 남편이 가장을 고소해도 역시 엄벌에 처했습니다. 이것은 그 주인에게 예속된 노비가 아닌 사람들조차도 처벌했던 것을 보여줍니다. 그만큼 친소 존비 관계에 따라 자신에게 가까운 사람을 고소하거나 고발하는 경우를 용납할 수 없다는 걸 존속 관계의 그 위중함을 법조문을 통해서 반영하려고 했던 결과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영조 때 만들어진 『속대전(續大典)』에 오면, 강상 윤리를 수호하기 위한 엄격한 규정들이 굉장히 많이 보충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중국 『대명률』보다 강상 윤리를 수호하려는 의지가 조선 법전의 경우에 더 강했다고 분석됩니다. 『속대전』은 강상죄인들을 모두 사형에 처했고, 그 처자식들을 노비로 삼았으며, 강상죄인이 나온 집을 파가저택(破家?澤)했습니다. 웅덩이를 파서 우물처럼 만들어버렸던 것이죠. 마을의 읍호(邑號)를 강등시키는가 하면 해당되는 고을의 수령을 파직시키기도 했습니다.

 

다산의 『흠흠신서』에도 중국과 조선의 여러 재판 사례들이 등장하는데, 하나의 사례만 마지막으로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강상범죄의 경우는 아니지만 충효열 가운데 열, 지조, 절개, 여성의 지조와 관련된 사건을 다룬 중국의 재판 사례를 다산이 논평한 것입니다. 중국의 재판 사례 내용은 왕창이라는 자가 자기 부인 추 씨가 적국의 병사에게 끌려갔다가 속전(贖錢)을 내고 풀려나와 집으로 왔는데, 그 부인을 부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절개를 잃었다고 해서 다시 재혼하면서 재혼 당시에 전 부인이 자결하는 사건을 다룬 재판입니다. 중국 형부에서는 왕창을 잘못된 행위를 했던 것으로 부정적으로 비판하고 죽은 부인을 왕 씨 가문의 선산에 묻을 것을 요구했는데요. 다산은 이 재판이 몹시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면서 이런 논평을 달고 있습니다. "중국의 풍속은 우리나라와 매우 다르다.

 

우리는 미천한 농민이나 종이라고 해도 절개를 잃은 아내에 대해 부모형제도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법관이나 소송관들도 강제로 권유하지 못한다. 더구나 효성스럽고 청렴한 양반들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우리나라가 예의 있는 나라라고 이렇게 불리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중국도 이제 쇠퇴하고 혼란스러워져 옛사람들의 법도가 사라졌구나. 우리 안목으로 화론(華論)을 살펴보면, 중원의 중화, 화론을 살펴보면 참으로 마음에 미혹된 점이 많으니 하물며 우리 조선의 사족들이 천족(賤族)들과 다름에 있어서랴." 다산의 이 발언은 전쟁통이나 심각한 불운의 상태에서 적국에 끌려가 다시 속전을 내고 돌아왔던 속환(贖還) 부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의 문제와 관련돼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병자호란이 끝난 이후에 절개를 지킨 순절(殉節) 부인, 절개를 잃어버린 여성을 실절(失節) 부인, 적국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우여곡절을 겪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던 환속(還屬) 부인들을 이렇게 세 가지 부류 이상으로 나누면서 여성들을 평가했던 시절이 있었는데요. 가부장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이혼을 요구하고 그런 여성들이 절개나 지조, 충효열의 강상 윤리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건을 다룬 이혼 재판들이 많았습니다.

 

여기에 대해 다산 같은 유학자도 보수적인 입장에서 충효열, 열의 가치를 엄격히 지켜야 되고, 그렇게 열의 가치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여성들을 비판하는 입장을 비추었다고 볼 수가 있는데요. 이렇게 유교사회의 법이라고 하는 것이 친소존비의 관계 혹은 남녀관계, 노주(奴主) 관계에서 보이는 것처럼 인륜 관계에 따라 차등적으로 재판을 했던 현상들, 이렇게 충효열과 효제자의 가치를 명분으로 삼아 그때그때마다 상이하게 차등적으로 판결했던 내용들은 오늘날 입장에서 보면 비판받을 여지를 충분히 갖고 있습니다. 또 나아가 그 당시 유교사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과도하게 충효열과 효제자 같은 도덕 덕목을 강제했던 현상도 발생합니다.

 

이 강상윤리를 지키지 못하면 엄격한 처벌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미리 미연에 효제 자를 실현하는 과도한 효자, 열 부 경쟁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당시 사회가 꼭 반드시 도덕적인 사회였다기보다는, 그런 인물도 분명히 있었겠지만 지나치게 도덕을 과도하게 맹신하는 도덕 지상주의 사회 같은 면모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빛과 그림자 양면을 다 갖고 있었는데요. 도덕적인 보편성을 지향했던 측면과 과도한 도덕 경쟁이 양산했던 사회적 문제점,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는 이 두 측면을 다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성호학파의 분열과 천주교 개종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 당시 남인, 성호학파 이외에도 많은 지식인들이 서학과 천주학에 관한 정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경기도 지역에 살고 있던 남인 성호학파 학자들, 그 후예들이 왜 그토록 서학과 천주교에 열의를 보였던 것일까. 이 점에 대해서 몇 가지 원인을 짚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기존에 여러 선행 연구가 있었는데, 그런 연구 성과들을 정리하면서 함께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들이 서울 경기도 지역에 세거(世居)하고 있었던 점, 일명 경화사족(京華士族)이라고 불리는 범주에 들어갔던 사람들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서학과 천주학의 내용들은 17세기, 18세기 동안 북경 사행원으로 갔던 사람들이 가져온 책과 여러 정보 형태를 통해 서울 경기도 지역의 학자들에게 널리 유포가 되었는데, 남인 성호학파 학자들도 바로 이렇게 근접한 지역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서학 정보와 천주학에 관한 이야기들을 가장 빠른 속도로 접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권철신, 권일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들, 이런 사람들도 경기도 남양주에 세거하고 있었고, 안정복도 경기도 광주 지역에 살고 있었고, 성호 이익 선생 본인도 안산 지역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새로운 신문물과 신정보는 서울 한양 가까이, 멀어도 경기도권에 살고 있었던 학자들이 가장 빠른 속도로 접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원인으로는 서울/경기도 남인 학자들 내부의 독특한 성향, 그들의 학문적 성격을 원인으로 짚어볼 수 있습니다. 서학과 천주학에 대한 정보는 남인 학자들보다 오히려 노론계 문인들이 더 빨리 접할 수 있었을 텐데요. 남인 학자들은 여러 가지 형편상 곤란했지만 노론계 자제들은 자제 군관이라는 이름으로 직접 북경에 다녀오면서 몸소 외국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론계 학자들, 북학파들이 천주학에 경도되거나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는 경우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어떤 이유 때문에 남인 성호학파 학자들은 이렇게 서학과 천주학에 깊이 빠져 들게 되었던 것일까. 이 점을 생각하면서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근원적인 학문적 열망과 공부 태도 등에 주목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입니다.

 

1777년, 1778년 무렵에 잘 알려진 것처럼 성호학파 문인들은 경기도 광주 천진암 주어사에 모여서 강학회(講學會), 일명 세미나와 같은 공부 모임을 가졌는데요. 그 당시 경기도 지역에 살고 있던 남인 학파의 지도자격이었던 권철신을 수장으로 해서 후배 성호학파 문인들이 낮에는 유교 경전을 공부하고 유교 경전에 나와 있는 예에 따라서 수행을 하기도 했고요. 밤에는 담경(談經), 밤에 찾아왔던 이벽을 중심으로 저녁에는 다른 경전을 공부했다고 하는데, 정약용의 「선중 씨 묘지명(先仲氏墓誌銘)」이라는 기록에 의하면, 이 ‘담경 했다’는 표현이 어떤 경전을 공부했던 것인지가 다소 모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연구자에 따라서는 담경이 성경을 비롯한 외국의 책자, 서학서를 보면서 공부했던 세미나 모임을 가리킨 거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유교 경전과 그에 준하는 전통적인 텍스트들을 계속 공부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런 공부 모임을 하던 도중에 이들이 공부했던 방법을 보면, 퇴계 이황의 전통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경(敬) 공부, 계신공구(戒愼恐懼)와 장경각 공(莊嚴恪恭), 함양(涵養) 공부 등을 강조했던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퇴계 이황 때부터도 이미 벌써 『성학십도(聖學十圖)』, 「경복 궁중 신기(景福宮重新記)」, 「무진 육조 소(戊辰六條疏)」와 같은 작품들에서 인격적인 상제, 이 상제를 공경하고 섬기는 계 신공 구, 경공부, 이런 것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호 이익 때부터 퇴계 이황을 계승한다는 학풍을 내세웠기 때문에 성호학파의 후예들도 공부하는 도중에 퇴계 이황이 강조했던 인격적 상제와 상제를 섬기는 공부 태도 등을 중시했던 것이 아니냐. 그래서 인격적인 천주와 천주학의 내용에도 그토록 깊이 빠져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분석했던 사례가 등장했던 것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 원인을 더 살펴볼 필요가 있겠는데요. 권일신과 정약종 등 초기에 천주교로 개종했던 신자들의 그 믿음과 관련된 것입니다. 정부 측에서 신문 기록으로 작성해놓았던 공초 기록인 『추국 일기(推鞫日記)』, 『사학징의(邪學懲義)』 같은 자료들을 살펴보면, 이들의 심문 과정, 문답 내용이 나와 있는데요.

 

이들은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부터 내세를 확신했고, 내세의 영혼이 불멸한다고 하는 점 그리고 내세에 가서 천주의 심판을 받고 누구는 영원한 복락과 행복을 느끼고, 누구는 영원한 고통을 당한다는 천당지옥에 관한 이야기, 이런 것을 진정으로 깊이 신앙하고 받아들였던 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안정복 같은 선배 유학자들이 “군자의 학문과 도는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사후의 대가를 바라고 하는 행동은 참된 윤리적 행동이 아니다.”라고 그렇게 후배들에게 말했지만, 이제 더 이상 권일신이나 정약종처럼 천주교로 개종했던 신자들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설득력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현세에서의 상 선벌악(賞善罰惡)이 불공정하다고 봤기 때문에 이 남인 학파의 후예들 몇몇 사람들은 내세에서라도 천주에 의한 공정한 상 선벌악이 이루어지는 것이 합당하다고 봤고, 그래서 사후세계의 이야기에 그토록 깊이 빠져들었던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남인들, 성호학파 사람들이 처했던 현실적인 처지를 생각해본다면 이것도 일면 이해가 됩니다. 남인 재상이었던 채제공 그리고 승진 가도를 한때 달렸던 이가환이나 정약용 같은 몇 사람을 제외하고 대다수 사람들은 중간에 과거를 포기하거나 아예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당론 때문에 화를 입은, 당화(黨禍)를 겪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비극적인 비참한 자기 친지들의 죽음과 가족, 가문의 몰락을 보면서 이런 상선벌악의 공정성을 기원하게 됐고, 그 결과 천주의 상 선벌악, 사후세계에서의 심판을 받아들이게 되는 상황까지 이르렀던 것이 아닌가. 이런 짐작을 해볼 수 있겠습니다. 이번에는 초기 천주교의 대표적인 신앙생활을 했던 세 사람의 인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샤를르 달레 신부의 『한국 천주교회사』 기록에 따르면, 초기 신자들 가운데, 전도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이벽, 이승훈, 권일신과 같은 인물들입니다. 이 가운데 이승훈은 알려진 것처럼 1783년과 84년에 서장관(書狀官)이 된 아버지를 따라서 북경에 직접 갔죠. 그래서 북경에 있던 천주당에서 서양인 신부들로부터 조선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세례를 받고 영세를 받고 귀국한 다음에 돌아와서 이승훈은 성직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권일신이나 이벽 등과 같은 주변의 친우들에게 세례를 해주었습니다. 이들은 모여서 천주교 종교예식도 거행했는데, 정식 성직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이 했던 천주교 예식 모임을 ‘가(假)성직자 제도’라고 이렇게 연구자들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1785년경에 서울 명례방 장학원 옆에서 중인(中人) 김범우 집에서도 역시 천주교 예식이 거행됐는데, 그 당시 유명한 많은 남인 학자, 성호학파 학자들이 참여했죠. 이것이 정부 관헌들에 의해 발각되고 나서부터는 이제 공개적으로 천주학과 천주학을 믿는 사람들, 천주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극심한 비판이 비등해졌습니다. 그래서 이승훈, 이벽, 권일신 이런 사람들을 징계해야 된다는 목소리가 굉장히 높았던 거죠.

 

이런 식으로 주변의 유생들, 여론, 정부 관헌, 국가의 통제, 압박이 극도로 심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부형 자제들이 문중 집안에서 그토록 가혹하게 몰아붙이지 않았더라면 초기 신앙을 갖게 됐던 사람들 마음의 태도나 자세도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벽 같은 경우만 봐도 집안의 부형(父兄), 아버지의 압박과 설득이 엄청났습니다. “네가 천주교 개종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내가 죽음으로써 대처하겠다.”라는 부모의 극심한 압박에 시달렸는지 병에 걸려 젊은 나이에 30대에 이벽은 사망하고 맙니다. 이벽의 작품으로 알려진 두 가지 중요한 저작물이 있는데요. 「천주 공경가(天主恭敬歌)」, 『성교 요지聖敎要旨』라는 작품들이 지금 이벽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것은 이승훈의 문집인 「만천 유고蔓川遺稿」에 한문본으로 실려 있습니다. 「천주 공경가」만 하더라도 천주에 관한 이야기, 천주를 존숭(尊崇)하는 것이, 공경하는 것이 삼강오륜과 부모, 군주에 대한 공경과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천주학의 교리 내용과 기존의 유교전통을 화해시키고 그 접점을 모색하려고 했던 노력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일부 내용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집안에는 어른 있고 나라에는 임금 있네 / 내 몸에는 영혼 있고 하늘에는 천주가 계시네 /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세 / 삼강오륜 지켜가자 천주공경 으뜸일세 / 이 내 몸은 죽어져도 영혼 남아 무궁하리 / 인륜도덕 천주 공경 영혼불멸 모르면은 / 살아서는 목석이요 죽어서는 지옥이라 / 천당 지옥 가보았냐 세상 사람 시비 마소 / 있는 천당 모른 시비 천당 없다 어이 아노 / 천주 공경 시비 마소. 믿어보고 깨달으면 영원무궁 영광일세” 이렇게 4·4조의 가사체 형태, 노래하고 따라 부르기 쉽게 만들어진 이 「천주 공경가」의 내용을 보면, 천주에 대한 공경과 사랑은 부모에 대한 공경, 사랑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당 지옥이 없다. 이것(천당 지옥)을 어찌 믿을 수 있느냐. 당신들이 가보았느냐.’라고 따지지만, ‘있다, 없다 지금부터 시비를 하지 말라. 천주 공경, 천주가 있느냐 없느냐. 한 번 믿어보고 깨달음을 얻은 뒤에나 알게 될 거다.’라고 하면서 나름대로 설득하려는 이야기도 후반부에 담겨 있습니다. 이런 「천주 공경가」와 달리 『성교 요지』는 완전히 천주교로 개종한 사람 입장에서, 전적으로 세계관을 바꾼 사람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개한 것인데요. 「성교 요지」 49절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내용들을 전반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교요지』는 「천주 공경가」와 달리 전면적인 전회를 통해 천주교 신앙의 세계로 완전히 돌아선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 또 한 사람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은 정약용의 바로 윗형인 정약종이라는 인물과 이 정약종이 만든 「주교 요지主敎要旨」라는 한글본 천주교 교리서입니다. 정약종은 1801년 신유교난(辛酉敎難, 신유박해) 때 죽음에 이르게 되죠. 정약종이 만든 「주교 요지主敎要旨」에서 그는 “사람 마음에 근거해서 조용히 생각해볼 때 천주가 존재한다는 건 누구나 받아들일 만하다. 천주는 유일무이하며, 무시 자재(無始自在)한 존재다. 천주는 이 세상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의 원인이 된다. 발생과 소멸의 원인이 된다.”라는 여러 맥락을 통해 천주의 존재는 확실하다는 것을 자기 나름의 입장에서 논증을 하려고 합니다. “인간이 죽으면 반드시 그 혼령, 영혼이 남아서 상벌을 받고 천주 심판을 받게 돼서 누구는 영원한 복락과 누구는 영원한 괴로움을 겪게 된다.”라는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주교 요지』 하편에서는 천주가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한 이야기, 인간이 악에 빠지자 천주가 강생 해서 예수를 내려보낸 이야기, 예수에 의한 인간 원죄의 속죄 과정 등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황사영이 중국에 있는 외국인 신부들에게 구조를 요청하면서, 협조를 요청하면서 보냈던 백서 편지에서도 말했듯이, 정약종의 『주교요지』 한글본 교리서가 유포됨에 따라 배우지 못한 민간의 여러 백성들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굉장히 큰 도움을 받았다. 이렇게 칭송할 만큼 『주교 요지』는 큰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면 이미 18세기 후반, 19세기 초 양반층 지식인이 만들었던 작품인데요. 유교와 천주교 사이에 조화를 모색할 수 있는 여지가 더 이상 없어지고, 완전히 한쪽 일면으로 넘어가 천주교의 세계를 접한 사람이 이 글을 서술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발생을 하면서 양쪽 진영 모두 완전히 폐쇄적으로 마음의 문을 닫고 학문적, 정치적, 어떤 입장에서도 유교와 천주교가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진 상황이 되었다는 것. 이것은 물론 국가의 가혹한 금령이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했던 상황이지만, ` 더 이상 바람직한 의미의 화해와 대화를 모색할 수 있는 여지가 사라졌다는 것은 후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일면 안타까운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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