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학파의 분열과 천주교 개종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 당시 남인, 성호학파 이외에도 많은 지식인들이 서학과 천주학에 관한 정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경기도 지역에 살고 있던 남인 성호학파 학자들, 그 후예들이 왜 그토록 서학과 천주교에 열의를 보였던 것일까. 이 점에 대해서 몇 가지 원인을 짚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기존에 여러 선행 연구가 있었는데, 그런 연구 성과들을 정리하면서 함께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들이 서울 경기도 지역에 세거(世居)하고 있었던 점, 일명 경화사족(京華士族)이라고 불리는 범주에 들어갔던 사람들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서학과 천주학의 내용들은 17세기, 18세기 동안 북경 사행원으로 갔던 사람들이 가져온 책과 여러 정보 형태를 통해 서울 경기도 지역의 학자들에게 널리 유포가 되었는데, 남인 성호학파 학자들도 바로 이렇게 근접한 지역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서학 정보와 천주학에 관한 이야기들을 가장 빠른 속도로 접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권철신, 권일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들, 이런 사람들도 경기도 남양주에 세거하고 있었고, 안정복도 경기도 광주 지역에 살고 있었고, 성호 이익 선생 본인도 안산 지역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새로운 신문물과 신정보는 서울 한양 가까이, 멀어도 경기도권에 살고 있었던 학자들이 가장 빠른 속도로 접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원인으로는 서울/경기도 남인 학자들 내부의 독특한 성향, 그들의 학문적 성격을 원인으로 짚어볼 수 있습니다. 서학과 천주학에 대한 정보는 남인 학자들보다 오히려 노론계 문인들이 더 빨리 접할 수 있었을 텐데요. 남인 학자들은 여러 가지 형편상 곤란했지만 노론계 자제들은 자제 군관이라는 이름으로 직접 북경에 다녀오면서 몸소 외국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론계 학자들, 북학파들이 천주학에 경도되거나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는 경우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어떤 이유 때문에 남인 성호학파 학자들은 이렇게 서학과 천주학에 깊이 빠져 들게 되었던 것일까. 이 점을 생각하면서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근원적인 학문적 열망과 공부 태도 등에 주목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입니다.
1777년, 1778년 무렵에 잘 알려진 것처럼 성호학파 문인들은 경기도 광주 천진암 주어사에 모여서 강학회(講學會), 일명 세미나와 같은 공부 모임을 가졌는데요. 그 당시 경기도 지역에 살고 있던 남인 학파의 지도자격이었던 권철신을 수장으로 해서 후배 성호학파 문인들이 낮에는 유교 경전을 공부하고 유교 경전에 나와 있는 예에 따라서 수행을 하기도 했고요. 밤에는 담경(談經), 밤에 찾아왔던 이벽을 중심으로 저녁에는 다른 경전을 공부했다고 하는데, 정약용의 「선중 씨 묘지명(先仲氏墓誌銘)」이라는 기록에 의하면, 이 ‘담경 했다’는 표현이 어떤 경전을 공부했던 것인지가 다소 모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연구자에 따라서는 담경이 성경을 비롯한 외국의 책자, 서학서를 보면서 공부했던 세미나 모임을 가리킨 거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유교 경전과 그에 준하는 전통적인 텍스트들을 계속 공부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런 공부 모임을 하던 도중에 이들이 공부했던 방법을 보면, 퇴계 이황의 전통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경(敬) 공부, 계신공구(戒愼恐懼)와 장경각 공(莊嚴恪恭), 함양(涵養) 공부 등을 강조했던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퇴계 이황 때부터도 이미 벌써 『성학십도(聖學十圖)』, 「경복 궁중 신기(景福宮重新記)」, 「무진 육조 소(戊辰六條疏)」와 같은 작품들에서 인격적인 상제, 이 상제를 공경하고 섬기는 계 신공 구, 경공부, 이런 것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호 이익 때부터 퇴계 이황을 계승한다는 학풍을 내세웠기 때문에 성호학파의 후예들도 공부하는 도중에 퇴계 이황이 강조했던 인격적 상제와 상제를 섬기는 공부 태도 등을 중시했던 것이 아니냐. 그래서 인격적인 천주와 천주학의 내용에도 그토록 깊이 빠져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분석했던 사례가 등장했던 것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 원인을 더 살펴볼 필요가 있겠는데요. 권일신과 정약종 등 초기에 천주교로 개종했던 신자들의 그 믿음과 관련된 것입니다. 정부 측에서 신문 기록으로 작성해놓았던 공초 기록인 『추국 일기(推鞫日記)』, 『사학징의(邪學懲義)』 같은 자료들을 살펴보면, 이들의 심문 과정, 문답 내용이 나와 있는데요.
이들은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부터 내세를 확신했고, 내세의 영혼이 불멸한다고 하는 점 그리고 내세에 가서 천주의 심판을 받고 누구는 영원한 복락과 행복을 느끼고, 누구는 영원한 고통을 당한다는 천당지옥에 관한 이야기, 이런 것을 진정으로 깊이 신앙하고 받아들였던 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안정복 같은 선배 유학자들이 “군자의 학문과 도는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사후의 대가를 바라고 하는 행동은 참된 윤리적 행동이 아니다.”라고 그렇게 후배들에게 말했지만, 이제 더 이상 권일신이나 정약종처럼 천주교로 개종했던 신자들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설득력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현세에서의 상 선벌악(賞善罰惡)이 불공정하다고 봤기 때문에 이 남인 학파의 후예들 몇몇 사람들은 내세에서라도 천주에 의한 공정한 상 선벌악이 이루어지는 것이 합당하다고 봤고, 그래서 사후세계의 이야기에 그토록 깊이 빠져들었던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남인들, 성호학파 사람들이 처했던 현실적인 처지를 생각해본다면 이것도 일면 이해가 됩니다. 남인 재상이었던 채제공 그리고 승진 가도를 한때 달렸던 이가환이나 정약용 같은 몇 사람을 제외하고 대다수 사람들은 중간에 과거를 포기하거나 아예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당론 때문에 화를 입은, 당화(黨禍)를 겪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비극적인 비참한 자기 친지들의 죽음과 가족, 가문의 몰락을 보면서 이런 상선벌악의 공정성을 기원하게 됐고, 그 결과 천주의 상 선벌악, 사후세계에서의 심판을 받아들이게 되는 상황까지 이르렀던 것이 아닌가. 이런 짐작을 해볼 수 있겠습니다. 이번에는 초기 천주교의 대표적인 신앙생활을 했던 세 사람의 인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샤를르 달레 신부의 『한국 천주교회사』 기록에 따르면, 초기 신자들 가운데, 전도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이벽, 이승훈, 권일신과 같은 인물들입니다. 이 가운데 이승훈은 알려진 것처럼 1783년과 84년에 서장관(書狀官)이 된 아버지를 따라서 북경에 직접 갔죠. 그래서 북경에 있던 천주당에서 서양인 신부들로부터 조선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세례를 받고 영세를 받고 귀국한 다음에 돌아와서 이승훈은 성직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권일신이나 이벽 등과 같은 주변의 친우들에게 세례를 해주었습니다. 이들은 모여서 천주교 종교예식도 거행했는데, 정식 성직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이 했던 천주교 예식 모임을 ‘가(假)성직자 제도’라고 이렇게 연구자들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1785년경에 서울 명례방 장학원 옆에서 중인(中人) 김범우 집에서도 역시 천주교 예식이 거행됐는데, 그 당시 유명한 많은 남인 학자, 성호학파 학자들이 참여했죠. 이것이 정부 관헌들에 의해 발각되고 나서부터는 이제 공개적으로 천주학과 천주학을 믿는 사람들, 천주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극심한 비판이 비등해졌습니다. 그래서 이승훈, 이벽, 권일신 이런 사람들을 징계해야 된다는 목소리가 굉장히 높았던 거죠.
이런 식으로 주변의 유생들, 여론, 정부 관헌, 국가의 통제, 압박이 극도로 심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부형 자제들이 문중 집안에서 그토록 가혹하게 몰아붙이지 않았더라면 초기 신앙을 갖게 됐던 사람들 마음의 태도나 자세도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벽 같은 경우만 봐도 집안의 부형(父兄), 아버지의 압박과 설득이 엄청났습니다. “네가 천주교 개종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내가 죽음으로써 대처하겠다.”라는 부모의 극심한 압박에 시달렸는지 병에 걸려 젊은 나이에 30대에 이벽은 사망하고 맙니다. 이벽의 작품으로 알려진 두 가지 중요한 저작물이 있는데요. 「천주 공경가(天主恭敬歌)」, 『성교 요지聖敎要旨』라는 작품들이 지금 이벽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것은 이승훈의 문집인 「만천 유고蔓川遺稿」에 한문본으로 실려 있습니다. 「천주 공경가」만 하더라도 천주에 관한 이야기, 천주를 존숭(尊崇)하는 것이, 공경하는 것이 삼강오륜과 부모, 군주에 대한 공경과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천주학의 교리 내용과 기존의 유교전통을 화해시키고 그 접점을 모색하려고 했던 노력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일부 내용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집안에는 어른 있고 나라에는 임금 있네 / 내 몸에는 영혼 있고 하늘에는 천주가 계시네 /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세 / 삼강오륜 지켜가자 천주공경 으뜸일세 / 이 내 몸은 죽어져도 영혼 남아 무궁하리 / 인륜도덕 천주 공경 영혼불멸 모르면은 / 살아서는 목석이요 죽어서는 지옥이라 / 천당 지옥 가보았냐 세상 사람 시비 마소 / 있는 천당 모른 시비 천당 없다 어이 아노 / 천주 공경 시비 마소. 믿어보고 깨달으면 영원무궁 영광일세” 이렇게 4·4조의 가사체 형태, 노래하고 따라 부르기 쉽게 만들어진 이 「천주 공경가」의 내용을 보면, 천주에 대한 공경과 사랑은 부모에 대한 공경, 사랑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당 지옥이 없다. 이것(천당 지옥)을 어찌 믿을 수 있느냐. 당신들이 가보았느냐.’라고 따지지만, ‘있다, 없다 지금부터 시비를 하지 말라. 천주 공경, 천주가 있느냐 없느냐. 한 번 믿어보고 깨달음을 얻은 뒤에나 알게 될 거다.’라고 하면서 나름대로 설득하려는 이야기도 후반부에 담겨 있습니다. 이런 「천주 공경가」와 달리 『성교 요지』는 완전히 천주교로 개종한 사람 입장에서, 전적으로 세계관을 바꾼 사람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개한 것인데요. 「성교 요지」 49절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내용들을 전반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교요지』는 「천주 공경가」와 달리 전면적인 전회를 통해 천주교 신앙의 세계로 완전히 돌아선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 또 한 사람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은 정약용의 바로 윗형인 정약종이라는 인물과 이 정약종이 만든 「주교 요지主敎要旨」라는 한글본 천주교 교리서입니다. 정약종은 1801년 신유교난(辛酉敎難, 신유박해) 때 죽음에 이르게 되죠. 정약종이 만든 「주교 요지主敎要旨」에서 그는 “사람 마음에 근거해서 조용히 생각해볼 때 천주가 존재한다는 건 누구나 받아들일 만하다. 천주는 유일무이하며, 무시 자재(無始自在)한 존재다. 천주는 이 세상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의 원인이 된다. 발생과 소멸의 원인이 된다.”라는 여러 맥락을 통해 천주의 존재는 확실하다는 것을 자기 나름의 입장에서 논증을 하려고 합니다. “인간이 죽으면 반드시 그 혼령, 영혼이 남아서 상벌을 받고 천주 심판을 받게 돼서 누구는 영원한 복락과 누구는 영원한 괴로움을 겪게 된다.”라는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주교 요지』 하편에서는 천주가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한 이야기, 인간이 악에 빠지자 천주가 강생 해서 예수를 내려보낸 이야기, 예수에 의한 인간 원죄의 속죄 과정 등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황사영이 중국에 있는 외국인 신부들에게 구조를 요청하면서, 협조를 요청하면서 보냈던 백서 편지에서도 말했듯이, 정약종의 『주교요지』 한글본 교리서가 유포됨에 따라 배우지 못한 민간의 여러 백성들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굉장히 큰 도움을 받았다. 이렇게 칭송할 만큼 『주교 요지』는 큰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면 이미 18세기 후반, 19세기 초 양반층 지식인이 만들었던 작품인데요. 유교와 천주교 사이에 조화를 모색할 수 있는 여지가 더 이상 없어지고, 완전히 한쪽 일면으로 넘어가 천주교의 세계를 접한 사람이 이 글을 서술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발생을 하면서 양쪽 진영 모두 완전히 폐쇄적으로 마음의 문을 닫고 학문적, 정치적, 어떤 입장에서도 유교와 천주교가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진 상황이 되었다는 것. 이것은 물론 국가의 가혹한 금령이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했던 상황이지만, ` 더 이상 바람직한 의미의 화해와 대화를 모색할 수 있는 여지가 사라졌다는 것은 후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일면 안타까운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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