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끝에 남아있는건

하룻밤의 짧은 조각들

Elastic Love

Elastic Love

Make me high

차가운 새벽 도시위에는

옷깃을 여민 사람들만

I’m still love

다신날 찾아오지 않는 널

못잊은채 향기만 남아

파랗게 점점 식어간

우리둘의 온도차이

Falling in elastic love with you

취해도 선명해지는 너일까

입술끝에 남아있는건

하룻밤의 짧은 조각들

Elastic Love

Elastic Love

Make me high

그대와의 사랑이란건

한순간의 사고같은 것

Elasitc Love

Elastic Love

Oooo

길고도 짧은 내 맘에

Lover band 같은 사랑

Falling in elastic love with you

눈물이 몰아치는건 왜일까

입술끝에 남아있는건

하룻밤의 짧은 조각들

Elastic Love

Elastic Love

Make me high

그대와의 사랑이란건

한순간의 사고같은 것

Elasitc Love

Elastic Love

Oooo

마음, 영혼 개념, 그리고 인간 마음의 자유의지 문제를 통해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혼이라는 말을 정약용이 직접 쓴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맹자요의(孟子要義)」라는 작품에서 다산은 이런 발언을 했습니다. 사람 마음에 대해 우리가 지칭할 때, 마음 심(心) 자를 쓰는데, 정약용은 이 마음 심자가 정확한 개념이 아니다. 그냥 임시로 빌려 쓰고 있을 뿐이다.라는 생각을 표명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죽게 되면 그 마음을 혼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은 혼백 할 때 이미 있었던 개념이고, 유학자들이 썼었던 거고요. 예식에서도 상례에서 초혼제(招魂祭), 혼을 부르는 의식 절차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사람 마음에 대해 마음 심 자, 심장 심 자를 쓰고 죽고 나면 그 마음을 혼이라고 임시로 부르는데, 정확한 명칭은 없다.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조금 의아하기도 합니다. 관련된 대목을 먼저 보겠습니다. “신(神)과 형(形)이, 신명(神明)과 형체가 오묘하게 결합하여 사람을 이룬다. 이 신, 신묘할 신 자, 신명은 형체(形體)가 없으며 이름도 없다. 그것이 형체가 없기 때문에 이름을 빌어서 그냥 신묘할 신 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마음 심(心) 자, (이것은 원래 심장이죠.) 이 심 자는 피를 주관하는 장기로서, (심장으로서) 신과 형이 오묘하게 결합된 기관이기 때문에 그것의 이름을 빌어 마음 심 자라고 부른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심장이라는 장기가 피가 모여지는, 혈관들이 모이는 육체적 기능을 하죠. 그리고 유학자들은 이 심장이 정신적인 기능을 하는 맑은 기(氣)로 이루어졌다고 봤기 때문에 이 심장이라는 장기는 육체적인 기능, 정신적인 기능을 함께 하고 있다고 이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 마음을 가리킬 때도 할 수 없이 그냥 임시로 개념을 빌어 와 심장이라는 것의 심 자로, 마음 심 자도 지칭하게 되었을 뿐이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서 형체를 떠나면 혼(魂)이라고 말한다. 맹자(孟子)는 그것을 대체(大體), 마음을 가리킬 때 소체(小體)가 아니라 대체(大體)라고도 했고요. 불가(佛家), 불교에서는 그 마음을 가리킬 때 법신(法身)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문자 상의 일정한 명칭이 없다.” 마음이라는 용어는 굉장히 역사가 오래된 것 같은데, 지금 유학자 정약용은 인간의 마음을 가리키는 문자 상의 적절한 명칭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우리가 흔히 써왔던 개념들로서는 자기가 생각하는 인간의 마음이나 정신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역시 이 맥락에서 예수회 신부들의 영혼에 관한 이야기를 좀 상기해볼 필요가 있겠죠. 마테오 리치는 『천주실의』에서 아니마(Anima) 개념을 번역하기 위해서 혼백(魂魄)이라는 단어에 주목했었습니다. 백(魄)이라고 하는 것은 둔탁한 육체적 기운이고 흩어지는 거니까 이 개념은 제외시켜버렸고요. 혼(魂)이라고 하는 게 흔히 정신 작용을 하는 맑은 기(氣)로 간주가 됐습니다. 그래서 혼 개념을 가지고 오면서 마테오 리치는 영묘(靈妙)하고 이성적인 혼이라고 해서 영명할 영 자를 가지고 와서 영혼(靈魂)이라는 조어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역시 마테오 리치가 말했던 영혼은 리치 입장에서는 기(氣)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는 다소 물질적이고 언젠가 흩어져 소멸되는 거지만 아니마를 의미하는 영혼은 불멸하는 비물질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치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정약용도 심 개념이나 인간의 혼, 그리고 신명은 기가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 마음은 기존의 유학자들이 쓴 기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정약용이 마음을 가리키는 용어는 영체(靈體), 영명지체(靈明之體), 이런 표현들을 쓰고 있습니다. 영혼이나 영성(靈性)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는 않고요. 뭔가 자기의 의도를 담은 그 마음 개념을 가리키기 위해서 영체나 영명 지체라는 표현을 쓴 것인데, 마치 서양 선교사들이 새로 만들어 썼던 영혼이라는 뉘앙스를 얼핏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다산이 이런 발언을 하기 때문이죠. “몸은, 인간의 몸은 부모의 정혈(精血)로부터 받지만 신명(神明:정신 작용을 하는 것)은 상제로부터 받는다.” 이 구절을 음미해보면 신명, 정신 작용의 기원과 인간의 정혈로 이루어진 육체가 이원화돼서 다른 세계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기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신명(정신 작용)을 분리시켰던 점에서 외국 선교사들의 인간에 관한 이해를 정약용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죽고 나면 혼이라고 말할 뿐이라고 했을 뿐 사후에 이 영체, 영명, 신명의 마음이 어떻게 되는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한데요. 천주학 입장에서는 더 중요한 것은 사후에 이 영혼이 불멸하면서 심판도 받고 상벌도 받으며 천당, 지옥을 왕래해야 되는 이야기가 중요했을 것입니다. 정약용은 이 사후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본인 글 어디에서도 단 한 마디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런 측면 혹은 반대 측면으로도 다산의 생각을 해석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습니다.

 

그다음 영혼 이외에 기호성(嗜好性)이라는 성(性, nature) 개념과 자유의지에 대한 정약용의 입장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호, 기호라고 하는 것은 요즘도 쓰고 있는 말이기는 하지만 다산 입장에서는 욕구나 욕망 개념과 유사하게 언급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성 개념이 기존의 주자학에서는 본체, 형이상학적인 어떤 태극의 리 개념으로 이해되었는데요. 정약용은 이 성 개념을 그런 본체나 리가 아니라 욕구 작용으로 보았기 때문에 성은 기호다. 기호성이다. 이런 표현을 쓴 것입니다. 이 기호성도 인간 마음 안에 내재되어 있는 거죠. 마음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는 다산의 발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총괄하면 영체, 우리 마음 안에는 영묘한 어떤 것이죠.

 

영체, 우리 마음 안에는 세 가지의 어떤 이치가 있다. 세 가지 요소나 이치가 있다. 본성(本性), 기호성이라고 하는 본성의 측면에서 말하면 선천적으로 선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한다. 이것은 맹자가 말한 성선(性善)이다.” 그 권형(權衡), 권형을 자주지권(自主之權)이라고 나중에 말하는데, 자기 스스로 주장할 수 있는 권리, 권형, 권형은 둘 다 저울이라는 한자어입니다. 자유롭게 의지한다는 의미를 담아서 정약용이 쓴 표현이죠. “이 권형의 측면에서 말을 하면 내가 선을 행할 수도 있고 내가 선택해서 악을 행할 수도 있다. 이것은 고자(告子)의 단수(湍水) 비유와 선악이 섞여있다는 양웅(揚雄)의 설이 지어진 원인이다.” 그리고 그 행사(行事), 실천하는 행사라는 말 표현이 요즘 어감과 많이 다른데요. 육체를 갖추고 하는 행위, 그러니까 육체성과 관련된 마음의 어떤 측면을 말하는 겁니다. “이 행사(行事), 의 측면에서 말하면 선을 하기가 아주 어렵고 악을 행하기가 도리어 쉽다.

 

이것은 순자의 성악설이 나온 원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우리 영체, 마음 안에는 이 세 가지 측면이 원래 모두 함께 들어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좀 낯선 용어들이 몇 가지 같이 나왔는데요. 정약용이 생각했던 마음에는 이렇게 세 가지 요소의 원리가 함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 개념을 여전히 중요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성을 욕구나 욕망, 기호 작용으로 풀이합니다. 도덕적 리(理), 본성이 깃들어 있는 건 인간이 선천적으로 도덕적 욕망을 갖고 태어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유학자들과 비슷하게 정약용은 선천적으로 인간에게는 윤리적인 욕망, 선을 좋아하고 불선(不善)에 대해 꺼려하는 마음이 선천적으로 있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권형, 권형이라는 개념이 자유의지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데요. 아무리 우리가 도덕적인 욕망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고 해도 그 욕망의 욕구대로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만 하는데,라고 마음속으로 느끼면서도 우리는 정반대의 다른 행동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욕구, 사적인 욕망을 쫓아갈 거냐. 도덕적인 욕망을 쫓아갈 거냐.

 

그 이외의 어떤 욕구를 쫓아갈 것이냐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의지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걸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로 그 대목에서 권형 혹은 자주지권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이 마테오 리치가 썼던 용어들과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해당되는 대목을 살펴보겠습니다. “맹자가 말한 성선, 성선설에 어찌 잘못이 있겠는가? 다만 어쩔 수 없이 선한 사람이라면 그에게 공로(功勞)가 없게 된다. (그러니까 선천적으로 선을 느끼는 것은 배고플 때 밥을 먹는 것과 비슷하겠죠. 그래서 그것은 인간에게 공로가 될 수 없다고 말한 겁니다.) 이에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는 권형을 인간에게 부여해서 자신의 주장에 따라 선을 향하려면 그것을 따르게 하고 악을 향하려면 그것을 따르게 했으니 바로 이것이 공로와 죄가 발생하는 이유다. 이로부터 선으로 향하는 것도 그대의 공로, 사람의 공로가 되며 악으로 치닫는 것도 사람의 죄가 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주지권에 관한 한 대목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하늘은 사람에게 자주지권, 자기 스스로 주장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서 그가 선을 하고자 하면 선을 하도록 하고, 악을 저지르고자 하면 악을 행하도록 하여 선악을 하려는 방향이 변해서 고정되지 않게 했다. 그런데 선을 할 수도 있고 악을 할 수도 있는 이치가 이미 반이 섞여 있다면 그 죄는 마땅히 반감되어야 할 것 같지만 죄를 지어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이유는 선한 성이, 본성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성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수치스러워하는 것이 분명한데, 이러한 성의 성향, 경향을 거슬러 악을 저지르면 그 죄를 면할 수가 있겠는가?” 권형과 자주지권을 설명하는 정약용의 두 대목을 살펴보았습니다. 맹자의 성선설을 거부하지는 않고 있는데요. 선천적으로 윤리적인 경향성, 윤리적인 욕구, 선한 걸 좋아하는 마음이 인간에게 있는 것도 맞다. 이 점에서는 맹자의 성선설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왜냐. 선천적으로 윤리적 경향성이 있어서 그것을 실현한다는 것은 다산에게 아직 맹목적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배고플 때 밥을 먹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죠. 따라서 선천적인 윤리적 욕망과 그것을 가로막는 사적인 이기적 욕망 사이에서 선한 욕망을 선택하는 자주지권이 반드시 개입되어야만 인간의 공로, 윤리적 공로가 성립될 수 있다. 이런 주장을 하려고 했던 셈입니다. 바로 이 권형과 자주지권이라는 표현에서 마테오 리치가 강조하려고 했었던 자유의지의 맥락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 이런 평가가 많이 등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을 해보면 차이점이 발생합니다. 마테오 리치가 유학자들이 매우 중시했었던 측은지심(惻隱之心) 개념을 비판했던 대목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마테오 리치는 양선(良善)과 습선(習善) 개념을 이야기합니다. 양선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천주에 의해 선천적으로 타고난 선천적인 선함입니다. 습선이라고 하는 건 자기 노력에 의해 후천적으로 만들어내는 선함입니다. 그런데 이 양선을 부정하지는 못했지만 조금 폄하하면서 마테오 리치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선천적으로 타고는 선한 마음, 그런 것은 어린아이나 심지어 동물에게도 있습니다. 자기 새끼를 예뻐하고 아파서 쓰러져 있는 같은 자기 개나 고양이도 측은하게 여기는 그런 행위를 하기 때문에 어린 아이나 동물도 선천적으로 이 양선에 해당하는 측은지심과 같은 걸 가지고 태어난다. 따라서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습선이 필요하다.

 

오히려 마테오 리치에게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건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하얀 도화지, 백지와도 같은 것이라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선한 본성의 마음을 다소 폄하하는 듯한 발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유학자들, 그리고 정약용은 이런 맥락에는 동의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에게는 측은지심,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고 측은하게 여기며 동정심을 느낄 수 있는 선천적인 마음이 원래 주어져 있다는 것. 이것을 굉장히 중요한 토대로 봤습니다. 이런 공감 능력이나 측은지심을 타고나야 비로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측은지심이 선한 본성, 기호성이 실현된 도덕적 마음입니다. 그래서 정약용은 마테오 리치와 달리 이 측은지심, 도덕적 마음, 이 도심을 굉장히 강조했고, 이 도심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기호성, 선한 본성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관련된 한 대목을 살펴보겠습니다.

 

"만일 선을 즐거워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성, (이게 타고난 본성이죠.) 이것을 주어서 선을 좋아하고 의로움에서 살찌도록 하지 않았다면 평생 동안 힘을 다해 조그만 선을 행하려고 해도 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기에 타고난 본성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진정 최고의 보물이니 존중하고 받들어서 잠시라도 어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중용의 존덕성(尊德性), 성을 존중하고 받들어야 된다는 대목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약용은 우리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선하고자 하는 윤리적 경향성, 남과 함께 기뻐하고, 남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는 이 윤리적인 마음과 경향성, 이 본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일말의 선이라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대목에서 강조합니다.

 

따라서 아무리 권형이나 자유의지를 도입했다고 해도 유학자로서의 정약용에게는 인간이 타고나면서 가지는 선을 좋아하는 본성이 가장 중요한 토대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듯 영혼 개념, 마음 개념, 그리고 자유의지, 권형이나 자주지권, 여러 대목을 살펴보더라도 서학이라고 하는 것은 정약용의 방대한 사유체계 속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구성하는 한 면, 한 축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렇게 평가해볼 수 있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산 정약용의 사유는 서학의 지적 충격과 도전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정약용에게는 서학의 영향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명, 청 시대의 다양한 학풍들, 양명학, 고증학, 훈고학적인 방법론, 일본 고학, 그리고 주자학, 조선시대 성호학파를 통해서 배웠었던 내용들, 이런 것들이 융합적으로 깃들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한 측면을 통해 일방적으로 정약용 사유의 형성을 평가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다산 정약용은 한편으로는 성호학파 선배들을 통해 서학과 천주학에 눈뜨게 됐었지만 또 마찬가지로 성호학파 선배들을 통해 조선 주자학, 성리학과 양명학, 일본 고학, 명나라, 청나라의 다른 학풍들도 균형 있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습니다. 18세기, 19세기에 이런 여러 다양한 사상의 물줄기 속에서 자신만의 학문, 자신만의 사상과 철학을 구조화하려고 했었던 다산 정약용. 어떻게 보면 20세기, 21세기에 학문을 하는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도 모범적인 선례가 되는 사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서양 학풍에 일방적으로 경도되거나 아니면 우리 것이 좋다고 해서 전통만을 고수하는 이런 양면적인 입장, 이 두 입장을 지양하면서 서로 이질적인 사유와 사상 간의 대화, 통섭을 모색했었던 측면에서 다산 정약용의 사유, 철학의 긍정적인 의미를 오늘날도 다시 되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정약용의 일표이서(一表二書)가 지향했던 유교적 공동체의 성격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약용은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다음에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라는 글에서 자신의 학문 인생을 이렇게 총평했습니다. "육경(六經)과 사서(四書)에 대한 연구로 개인 수양을 삼고, 일표이서(一表二書)로 천하 국가를 위하고자 했으니 본말(本末)을 모두 갖추었다." 본말을 모두 갖추었다고 했을 때 본말이라는 것은 유학자 사대부가 자기 개인 수양을 위한 공부와 천하 국가를 경영하고자 하기 위한 일을 동시에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흔히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고 하는데요. 주로 경학(經學) 작품으로 알려진 작품들이 이 수기(修己), 도덕적 인간의 완성을 위한 목표를 갖고 있고, 경세학(經世學)이라고 알려진 다산의 작품들이 천하 국가를 경영하기 위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일표이서(一表二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라는 책, 이 정법서(政法書) 세 가지 책이 바로 정약용의 경세학을 대표하는 저작들입니다. 이 세 가지 책 성격에 대해서는 다산 본인이 이야기한 바가 있습니다. "『경세유표』라는 책은 그때그때마다의 시용(試用)에 구애받지 않고 장기적으로 미래를 내다보면서 이상적인 국가 운영 시스템을 마련한 책이다." 이렇게 소개를 했고요. 그와 달리 "『목민심서』나 『흠흠신서』는 당시 조선의 현실적인 법제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가장 시급한 민생 현안들을 그때그때 해결하기 위해 마련한 책이다." 이렇게 성격을 비교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번에는 다산의 정법서 일표이서 가운데 『경세유표』에 대해서 대략적인 성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약용도 일표이서에서 유교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는데, 이 유교적인 공동체 역시 중화 문명을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중화 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일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대략 두 가지 정도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왕도정치로 지칭되는 이상적인 정치 공동체, 이것을 실현한 상태가 문명의 상태이고요.

 

또 하나는 이런 왕도정치를 뒷받침하고 있는 효제충신의 도덕과 도덕을 구현하기 위한 다양한 예제(禮制)들입니다. 젊었을 때 정약용은 「맹자 대책문(孟子對策問)」이라는 글을 써서 정조에게 올린 적이 있는데요. 이 글에서도 이런 중화문명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공자나 맹자의 뜻도 존 주(尊周), 주나라를 섬기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존 왕(尊王), 나아가 행왕(行王), 왕도정치를 지향해서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다."라고 이런 해석을 단 적이 있었습니다. 정약용에게도 도덕과 예교(禮敎), 바로 이것이 왕도정치라는 이상적인 문명국가를 실현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대표적인 정치 저작인 『경세유표』에서도 이런 유교적인 예치(禮治) 국가를 지향하기 위한 대안을 마련해놓은 것입니다. 『경세유표』의 원래 제목은 『방례초본(邦禮草本)』입니다. 여기서 '방례'라고 하는 것은 방국(邦國), 번국(藩國), 다시 말해 제후국의 예제를 의미합니다. 천자국(天子國)이 아닌 제후 국가로서 조선이 천자국에 대해 어떤 외교 의례를 갖추어야 하는가, 이런 얘기로부터 시작해서 조선 내부에는 어떤 전장 제도, 예제를 갖추어야 하는가 하는 내용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방례초본』이고, 그 책의 이름을 『경세유표』라고 훗날 바꾼 것입니다. 이런 내용과 관련해 정약용이 했던 설명 한 대목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조선 같은 번국, 제후국의 의절(儀節)은 완전히 속국인 식민지화된 내복(內服)과도 같지 않고, 또한 조선이 직접 중국으로부터 명령을 받지도 않기 때문에 제후국의 일정한 도리를 지키며 일정한 분수만 넘지 않으면 그만이지, 그 이상 과도하게 어떤 무엇을 취할 필요는 없다." 이 이야기는 예제를 매개로 해서 국내외 관계를 잘 조정하기 위한 내용들을 제후 국가의 유교 지식인 사대부들이 자신들의 이상적인 관념에 따라 자유롭게 구성하고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이렇게 번국, 제후국의 의례, 의절, 예제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해놨고요. 다른 책을 통해서는 왕실의 예(禮), 왕실 가문들이 지켜야 하는 예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으며, 또 다른 저작에서는 지방 향촌의 향례(鄕禮)에 대해서 해명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문중에서, 가문에서 시행해야 될 가례(家禮)를 다룬 본인의 중요한 책자들도 만들었습니다. 다음의 표에서 보실 수 있는 것처럼 한 집안에서는 가부장이 문중에서 가례를 따라서 집안의 예식을 거행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다산은 『사례 가식(四禮家式)』이라는 작품을 만들었죠. 그리고 조금 윗단계로 올라가서 향촌 마을에서는 지방의 재지 사족(在地士族)들, 이런 사람들이 향약(鄕約)을 시행할 수 있는데, 향약도 향례의 일종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올라가 각 지방의 관하에서는 군수 현령들이 문묘(文廟) 석전제(釋奠祭)나 군현의 다양한 향례, 향사례(鄕射禮), 향음주례(鄕飮酒禮) 같은 역시 마찬가지로 향례를 시행해서 지방 사족들과 토족, 소민(小民)들을 교화하도록 설정을 해놓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윗단계로 올라가면 지방 군수, 현령 같은 위정자들, 지방 목민관들은 중앙정부, 국왕에 대해서 망 하의 례(望賀儀禮)나 진하 표전(進賀表箋) 같은 예식을 거행할 수 있었죠. 그리고 또 중앙정부에서 신하, 사대부들은 국왕에 대해서 수 조하 의례(受朝賀儀禮)를 비롯한 각종 예식을 거행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후 국가의 국왕, 왕들, 고려 왕이나 조선의 왕도 천자 국가에 대해서 다양한 의절, 예제를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내용들을 쭉 다루면서 번국, 제후 국가 내에서는 어떤 예제와 시스템을 갖추어야 되는가를 상세히 논한 책이 바로 『경세유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세유표』에서 다루고 있는 제후 국가의 예식, 이런 것들은 대략적으로만 주어져 있었을 뿐 어떻게 해야 제후 국가 내부의 외교의례와 전장 제도들을 만들 수 있는지 자세한 내용은 구성돼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조선 국왕과 신료, 다양한 관직자들이 천하 질서, 예치 시스템에서 어떤 자리를 점하고 있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전반적인 관료제 시스템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를 새롭게 만들어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례로 정약용도 『경세유표』에서 조선의 중앙정부의 조직을 만들어야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중국 고대 『주례(周禮)』에 기반해서 천자국이 360개의 관서로 구성되어 있다면 제후국 가는 이 정도 규모를 구성하는 게 적절하다는 판단에서 제안된 것입니다. 또한 관직 체계도 9등급 정도로 나누어서 재구성을 했는데, 1품, 2품을 정(正)? 종(從)으로 하고 3 품부터는 대부(大夫)로, 4 품부터 9품까지는 상사(上士), 중사(中士), 하사(下士)의 직책으로 규정을 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사(士)와 대부의 직책을 새로 규정한 것도 번국의 의례에 맞게 다산이라는 유학자 입장에서 제안된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렇게 천자국과 제후국 간의 예를 매개로 한 위계질서는 더 나아가 제후국 내부의 신분질서, 인륜 관계를 새롭게 재구성하도록 하는 중요한 명분을 제공했습니다.

 

정약용은 방국례, 전국의 예에 해당되는 『경세유표』를 작성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조선 내부의 통치질서, 신분관계, 예를 들어 군신관계, 관인, 관리와 민중의 관계, 사족과 상한(常漢), 평민들의 관계, 주인과 노비의 관계들을 적절하게 명분에 맞게 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의 사례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주례」의 ‘향수제(鄕遂制)’라는 것을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향수라는 용어에서 '향(鄕)'이라는 것은 고대 국가의 도성 내부의 여섯 마을, 육향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육향 주변에, 도성 근교에 육수(六遂) 지역을 따로 마련하도록 구조화해놨던 게 향수 제인 데요. 이 육향이라는 것을, 도성 내부에 있던 육향 마을의 구성을 다산은 여러 경전을 고증하면서 다음과 같이 재해석해냈습니다. 도표를 보시면 보이시겠지만 도성 내부의 중앙에는 왕성, 궁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궁궐의 앞쪽에는 육조(六曹), 정부 관청들이 늘어서 있고요. 궁궐의 뒤쪽에는 상공업, 상업, 수공업 특구, 특수지역을 마련했습니다.

 

경제구역이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양옆으로 육향, 여섯 마을들이 설계되어 있는데, 바로 이 육향의 여섯 마을에서 거행하는 예식을 향례라고 해서 이 내용을 고대 경전을 통해 고증을 해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약용에 의하면 바로 이 육향의 향례는 원래 서울의 예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시대가 바뀌어서 조선은 지방을 군현제로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천자국 같은 봉건제 시스템이 아니었던 거죠. 그래서 번국의 상황에 맞게, 제후국의 상황에 맞게 이 육향제를 정약용은 재해석했습니다. 즉, 지방 향촌의 목민관들, 위정자들이 고대 육향의 향례를 지금 지방 향촌의 향례로 거행하면 되겠다. 군수 현령이 다스리는 지방이 옛날 제후국의 봉토와도 같고, 지방의 수령들이 과거 향대부나 주장(州長)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육향의 서울의 예식을 지방 군현의 향례로 거행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정약용의 육향제에 대한 해석도 천자국의 고대의 예를 조선, 제후국에 맞게 재해석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경세유표는 제후국의 지위와 상황에 맞게 원칙적으로 중앙정부 조직을 구성하도록 시도를 했고, 마찬가지로 지방 행정 시스템도 중앙과 일관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고 했습니다.

 

『목민심서』 내용을 보면 이호 예 병형 공(吏戶禮兵刑工), 그 행정 파트가 서울의 중앙정부와 똑같이 육전(六典) 체제로 운영되도록 전개되어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중앙과 지방행정의 통일, 관직제도, 신분 등급의 관리, 도성과 향촌 주거지를 구획하는 것, 학교 교육 그리고 과거를 통한 인재 선발, 조세, 토지, 군역 제도 등 모든 분야를 총망라해서 정약용은 『경세유표』를 통해 예치 그리고 법제의 원칙에 맞게 질서 정연하게 국가 운영 시스템을 구조화하려고 했습니다. 한때 정약용의 『경세유표』는 왕권 강화론을 지향하는 작품이 아니냐고 해석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경세유표』는 단순히 국왕이나 특정한 신분의 구성원을 지지하기 위해 기획된 텍스트는 아니었습니다. 하다 못해 국왕도 의정부나 육조로 편성된 관료제 시스템에 철저히 종속되도록 공적인 체계를 구상하는 것이 다산의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약용은 일체의 국왕 관련 직속기구들, 승정원 같은 비서실, 종친부 같은 왕실의 친인척에 관련된 부처들 그리고 친위부대들, 이런 직속기구들을 최대한 모두 다 없애버리고 오직 국왕에게는 관리 임면 권한 그리고 고적제(考績制), 인사고과제를 평가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이 두 가지 권한 정도만 국왕에게 남겨놓았습니다.

 

국왕도 이러했을 정도니까 다른 신료들은 말할 것도 없었겠죠. 그래서 유교사회에서 실현 가능한 공정하고 원칙적인,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방식의 일관된 정치 시스템을 고안하려고 했던 것이 정약용의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정약용의 『경세유표』라는 텍스트 아래에는 이렇게 예치 시스템, 예제(禮制)에 대한 강한 신념이 있고요. 이 예의 정신을 돕도록 고안되어 있는 유교적 성격의 법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유학자들의 예제와 유 교화된 법은 차등적이고 권위적이라는 심각한 비판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여지가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인륜 개념을 중시했던 유교 지식인들은 모든 사회 구성원들, 인간을 똑같이 획일적, 일률적인 존재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의 능력이 다르고 타고난 성품, 성격이 다르고, 공동체에서의 역할과 공로(功勞)가 제각기 다르다고 보았기 때문에 어떤 타당한 기준들에 의해서 구성원들을 차등적으로 대우하는 것이 오히려 공정하다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통치 원리로써의 예, 예제라고 하는 것은 이런 차이점들을 염두에 두고 상하귀천(上下貴賤), 관리들 관직의 차이죠? 친소 존비(親疎尊卑), 어떤 혈연적인 관계의 차이들, 이런 것들에 따라서 상이한 책임과 역할, 권리를 관계 맺는 인륜 관계의 구성원들에게 부여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더구나 예라고 하는 것은 윗사람과 아랫사람 상호 간에 쌍무(雙務)적인 책임감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윗사람이 아랫사람들에게 강한 책무를 요구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윗사람이 잘못하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비판하고 저항할 수 있는 명분도 동등하게 제공을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부정적인, 비판적인 맥락 이외에도 다른 사회적 기능이나 효과에 대해서도 함께 비판적으로 재성찰을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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