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영혼 개념, 그리고 인간 마음의 자유의지 문제를 통해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혼이라는 말을 정약용이 직접 쓴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맹자요의(孟子要義)」라는 작품에서 다산은 이런 발언을 했습니다. 사람 마음에 대해 우리가 지칭할 때, 마음 심(心) 자를 쓰는데, 정약용은 이 마음 심자가 정확한 개념이 아니다. 그냥 임시로 빌려 쓰고 있을 뿐이다.라는 생각을 표명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죽게 되면 그 마음을 혼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은 혼백 할 때 이미 있었던 개념이고, 유학자들이 썼었던 거고요. 예식에서도 상례에서 초혼제(招魂祭), 혼을 부르는 의식 절차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사람 마음에 대해 마음 심 자, 심장 심 자를 쓰고 죽고 나면 그 마음을 혼이라고 임시로 부르는데, 정확한 명칭은 없다.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조금 의아하기도 합니다. 관련된 대목을 먼저 보겠습니다. “신(神)과 형(形)이, 신명(神明)과 형체가 오묘하게 결합하여 사람을 이룬다. 이 신, 신묘할 신 자, 신명은 형체(形體)가 없으며 이름도 없다. 그것이 형체가 없기 때문에 이름을 빌어서 그냥 신묘할 신 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마음 심(心) 자, (이것은 원래 심장이죠.) 이 심 자는 피를 주관하는 장기로서, (심장으로서) 신과 형이 오묘하게 결합된 기관이기 때문에 그것의 이름을 빌어 마음 심 자라고 부른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심장이라는 장기가 피가 모여지는, 혈관들이 모이는 육체적 기능을 하죠. 그리고 유학자들은 이 심장이 정신적인 기능을 하는 맑은 기(氣)로 이루어졌다고 봤기 때문에 이 심장이라는 장기는 육체적인 기능, 정신적인 기능을 함께 하고 있다고 이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 마음을 가리킬 때도 할 수 없이 그냥 임시로 개념을 빌어 와 심장이라는 것의 심 자로, 마음 심 자도 지칭하게 되었을 뿐이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서 형체를 떠나면 혼(魂)이라고 말한다. 맹자(孟子)는 그것을 대체(大體), 마음을 가리킬 때 소체(小體)가 아니라 대체(大體)라고도 했고요. 불가(佛家), 불교에서는 그 마음을 가리킬 때 법신(法身)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문자 상의 일정한 명칭이 없다.” 마음이라는 용어는 굉장히 역사가 오래된 것 같은데, 지금 유학자 정약용은 인간의 마음을 가리키는 문자 상의 적절한 명칭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우리가 흔히 써왔던 개념들로서는 자기가 생각하는 인간의 마음이나 정신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역시 이 맥락에서 예수회 신부들의 영혼에 관한 이야기를 좀 상기해볼 필요가 있겠죠. 마테오 리치는 『천주실의』에서 아니마(Anima) 개념을 번역하기 위해서 혼백(魂魄)이라는 단어에 주목했었습니다. 백(魄)이라고 하는 것은 둔탁한 육체적 기운이고 흩어지는 거니까 이 개념은 제외시켜버렸고요. 혼(魂)이라고 하는 게 흔히 정신 작용을 하는 맑은 기(氣)로 간주가 됐습니다. 그래서 혼 개념을 가지고 오면서 마테오 리치는 영묘(靈妙)하고 이성적인 혼이라고 해서 영명할 영 자를 가지고 와서 영혼(靈魂)이라는 조어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역시 마테오 리치가 말했던 영혼은 리치 입장에서는 기(氣)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는 다소 물질적이고 언젠가 흩어져 소멸되는 거지만 아니마를 의미하는 영혼은 불멸하는 비물질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치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정약용도 심 개념이나 인간의 혼, 그리고 신명은 기가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 마음은 기존의 유학자들이 쓴 기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정약용이 마음을 가리키는 용어는 영체(靈體), 영명지체(靈明之體), 이런 표현들을 쓰고 있습니다. 영혼이나 영성(靈性)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는 않고요. 뭔가 자기의 의도를 담은 그 마음 개념을 가리키기 위해서 영체나 영명 지체라는 표현을 쓴 것인데, 마치 서양 선교사들이 새로 만들어 썼던 영혼이라는 뉘앙스를 얼핏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다산이 이런 발언을 하기 때문이죠. “몸은, 인간의 몸은 부모의 정혈(精血)로부터 받지만 신명(神明:정신 작용을 하는 것)은 상제로부터 받는다.” 이 구절을 음미해보면 신명, 정신 작용의 기원과 인간의 정혈로 이루어진 육체가 이원화돼서 다른 세계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기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신명(정신 작용)을 분리시켰던 점에서 외국 선교사들의 인간에 관한 이해를 정약용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죽고 나면 혼이라고 말할 뿐이라고 했을 뿐 사후에 이 영체, 영명, 신명의 마음이 어떻게 되는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한데요. 천주학 입장에서는 더 중요한 것은 사후에 이 영혼이 불멸하면서 심판도 받고 상벌도 받으며 천당, 지옥을 왕래해야 되는 이야기가 중요했을 것입니다. 정약용은 이 사후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본인 글 어디에서도 단 한 마디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런 측면 혹은 반대 측면으로도 다산의 생각을 해석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습니다.
그다음 영혼 이외에 기호성(嗜好性)이라는 성(性, nature) 개념과 자유의지에 대한 정약용의 입장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호, 기호라고 하는 것은 요즘도 쓰고 있는 말이기는 하지만 다산 입장에서는 욕구나 욕망 개념과 유사하게 언급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성 개념이 기존의 주자학에서는 본체, 형이상학적인 어떤 태극의 리 개념으로 이해되었는데요. 정약용은 이 성 개념을 그런 본체나 리가 아니라 욕구 작용으로 보았기 때문에 성은 기호다. 기호성이다. 이런 표현을 쓴 것입니다. 이 기호성도 인간 마음 안에 내재되어 있는 거죠. 마음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는 다산의 발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총괄하면 영체, 우리 마음 안에는 영묘한 어떤 것이죠.
영체, 우리 마음 안에는 세 가지의 어떤 이치가 있다. 세 가지 요소나 이치가 있다. 본성(本性), 기호성이라고 하는 본성의 측면에서 말하면 선천적으로 선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한다. 이것은 맹자가 말한 성선(性善)이다.” 그 권형(權衡), 권형을 자주지권(自主之權)이라고 나중에 말하는데, 자기 스스로 주장할 수 있는 권리, 권형, 권형은 둘 다 저울이라는 한자어입니다. 자유롭게 의지한다는 의미를 담아서 정약용이 쓴 표현이죠. “이 권형의 측면에서 말을 하면 내가 선을 행할 수도 있고 내가 선택해서 악을 행할 수도 있다. 이것은 고자(告子)의 단수(湍水) 비유와 선악이 섞여있다는 양웅(揚雄)의 설이 지어진 원인이다.” 그리고 그 행사(行事), 실천하는 행사라는 말 표현이 요즘 어감과 많이 다른데요. 육체를 갖추고 하는 행위, 그러니까 육체성과 관련된 마음의 어떤 측면을 말하는 겁니다. “이 행사(行事), 의 측면에서 말하면 선을 하기가 아주 어렵고 악을 행하기가 도리어 쉽다.
이것은 순자의 성악설이 나온 원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우리 영체, 마음 안에는 이 세 가지 측면이 원래 모두 함께 들어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좀 낯선 용어들이 몇 가지 같이 나왔는데요. 정약용이 생각했던 마음에는 이렇게 세 가지 요소의 원리가 함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 개념을 여전히 중요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성을 욕구나 욕망, 기호 작용으로 풀이합니다. 도덕적 리(理), 본성이 깃들어 있는 건 인간이 선천적으로 도덕적 욕망을 갖고 태어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유학자들과 비슷하게 정약용은 선천적으로 인간에게는 윤리적인 욕망, 선을 좋아하고 불선(不善)에 대해 꺼려하는 마음이 선천적으로 있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권형, 권형이라는 개념이 자유의지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데요. 아무리 우리가 도덕적인 욕망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고 해도 그 욕망의 욕구대로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만 하는데,라고 마음속으로 느끼면서도 우리는 정반대의 다른 행동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욕구, 사적인 욕망을 쫓아갈 거냐. 도덕적인 욕망을 쫓아갈 거냐.
그 이외의 어떤 욕구를 쫓아갈 것이냐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의지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걸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로 그 대목에서 권형 혹은 자주지권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이 마테오 리치가 썼던 용어들과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해당되는 대목을 살펴보겠습니다. “맹자가 말한 성선, 성선설에 어찌 잘못이 있겠는가? 다만 어쩔 수 없이 선한 사람이라면 그에게 공로(功勞)가 없게 된다. (그러니까 선천적으로 선을 느끼는 것은 배고플 때 밥을 먹는 것과 비슷하겠죠. 그래서 그것은 인간에게 공로가 될 수 없다고 말한 겁니다.) 이에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는 권형을 인간에게 부여해서 자신의 주장에 따라 선을 향하려면 그것을 따르게 하고 악을 향하려면 그것을 따르게 했으니 바로 이것이 공로와 죄가 발생하는 이유다. 이로부터 선으로 향하는 것도 그대의 공로, 사람의 공로가 되며 악으로 치닫는 것도 사람의 죄가 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주지권에 관한 한 대목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하늘은 사람에게 자주지권, 자기 스스로 주장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서 그가 선을 하고자 하면 선을 하도록 하고, 악을 저지르고자 하면 악을 행하도록 하여 선악을 하려는 방향이 변해서 고정되지 않게 했다. 그런데 선을 할 수도 있고 악을 할 수도 있는 이치가 이미 반이 섞여 있다면 그 죄는 마땅히 반감되어야 할 것 같지만 죄를 지어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이유는 선한 성이, 본성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성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수치스러워하는 것이 분명한데, 이러한 성의 성향, 경향을 거슬러 악을 저지르면 그 죄를 면할 수가 있겠는가?” 권형과 자주지권을 설명하는 정약용의 두 대목을 살펴보았습니다. 맹자의 성선설을 거부하지는 않고 있는데요. 선천적으로 윤리적인 경향성, 윤리적인 욕구, 선한 걸 좋아하는 마음이 인간에게 있는 것도 맞다. 이 점에서는 맹자의 성선설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왜냐. 선천적으로 윤리적 경향성이 있어서 그것을 실현한다는 것은 다산에게 아직 맹목적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배고플 때 밥을 먹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죠. 따라서 선천적인 윤리적 욕망과 그것을 가로막는 사적인 이기적 욕망 사이에서 선한 욕망을 선택하는 자주지권이 반드시 개입되어야만 인간의 공로, 윤리적 공로가 성립될 수 있다. 이런 주장을 하려고 했던 셈입니다. 바로 이 권형과 자주지권이라는 표현에서 마테오 리치가 강조하려고 했었던 자유의지의 맥락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 이런 평가가 많이 등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을 해보면 차이점이 발생합니다. 마테오 리치가 유학자들이 매우 중시했었던 측은지심(惻隱之心) 개념을 비판했던 대목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마테오 리치는 양선(良善)과 습선(習善) 개념을 이야기합니다. 양선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천주에 의해 선천적으로 타고난 선천적인 선함입니다. 습선이라고 하는 건 자기 노력에 의해 후천적으로 만들어내는 선함입니다. 그런데 이 양선을 부정하지는 못했지만 조금 폄하하면서 마테오 리치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선천적으로 타고는 선한 마음, 그런 것은 어린아이나 심지어 동물에게도 있습니다. 자기 새끼를 예뻐하고 아파서 쓰러져 있는 같은 자기 개나 고양이도 측은하게 여기는 그런 행위를 하기 때문에 어린 아이나 동물도 선천적으로 이 양선에 해당하는 측은지심과 같은 걸 가지고 태어난다. 따라서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습선이 필요하다.
오히려 마테오 리치에게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건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하얀 도화지, 백지와도 같은 것이라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선한 본성의 마음을 다소 폄하하는 듯한 발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유학자들, 그리고 정약용은 이런 맥락에는 동의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에게는 측은지심,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고 측은하게 여기며 동정심을 느낄 수 있는 선천적인 마음이 원래 주어져 있다는 것. 이것을 굉장히 중요한 토대로 봤습니다. 이런 공감 능력이나 측은지심을 타고나야 비로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측은지심이 선한 본성, 기호성이 실현된 도덕적 마음입니다. 그래서 정약용은 마테오 리치와 달리 이 측은지심, 도덕적 마음, 이 도심을 굉장히 강조했고, 이 도심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기호성, 선한 본성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관련된 한 대목을 살펴보겠습니다.
"만일 선을 즐거워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성, (이게 타고난 본성이죠.) 이것을 주어서 선을 좋아하고 의로움에서 살찌도록 하지 않았다면 평생 동안 힘을 다해 조그만 선을 행하려고 해도 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기에 타고난 본성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진정 최고의 보물이니 존중하고 받들어서 잠시라도 어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중용의 존덕성(尊德性), 성을 존중하고 받들어야 된다는 대목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약용은 우리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선하고자 하는 윤리적 경향성, 남과 함께 기뻐하고, 남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는 이 윤리적인 마음과 경향성, 이 본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일말의 선이라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대목에서 강조합니다.
따라서 아무리 권형이나 자유의지를 도입했다고 해도 유학자로서의 정약용에게는 인간이 타고나면서 가지는 선을 좋아하는 본성이 가장 중요한 토대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듯 영혼 개념, 마음 개념, 그리고 자유의지, 권형이나 자주지권, 여러 대목을 살펴보더라도 서학이라고 하는 것은 정약용의 방대한 사유체계 속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구성하는 한 면, 한 축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렇게 평가해볼 수 있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산 정약용의 사유는 서학의 지적 충격과 도전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정약용에게는 서학의 영향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명, 청 시대의 다양한 학풍들, 양명학, 고증학, 훈고학적인 방법론, 일본 고학, 그리고 주자학, 조선시대 성호학파를 통해서 배웠었던 내용들, 이런 것들이 융합적으로 깃들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한 측면을 통해 일방적으로 정약용 사유의 형성을 평가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다산 정약용은 한편으로는 성호학파 선배들을 통해 서학과 천주학에 눈뜨게 됐었지만 또 마찬가지로 성호학파 선배들을 통해 조선 주자학, 성리학과 양명학, 일본 고학, 명나라, 청나라의 다른 학풍들도 균형 있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습니다. 18세기, 19세기에 이런 여러 다양한 사상의 물줄기 속에서 자신만의 학문, 자신만의 사상과 철학을 구조화하려고 했었던 다산 정약용. 어떻게 보면 20세기, 21세기에 학문을 하는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도 모범적인 선례가 되는 사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서양 학풍에 일방적으로 경도되거나 아니면 우리 것이 좋다고 해서 전통만을 고수하는 이런 양면적인 입장, 이 두 입장을 지양하면서 서로 이질적인 사유와 사상 간의 대화, 통섭을 모색했었던 측면에서 다산 정약용의 사유, 철학의 긍정적인 의미를 오늘날도 다시 되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